‘다현사 세대’가 읽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지난달 초 후배에게 『건국과 부국(김일영, 생각의 나무刊)』이라는 책을 건네주면서 일독을 권한 적이 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나름의 평가도 덧붙였다. 몇 일 뒤 그 후배에게서 몹시 당황스런 이야기가 전해졌다.

서울 소재 대학의 사범대 역사교육과에 재학중인 후배의 동생이 “왜 그런 책을 읽고 있느냐?”고 핀잔을 줬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책의 표지에 <방일영 문화재단 현대사 강좌시리즈>라고 써있는 것을 문제 삼았다고 한다. 방일영 씨가 조선일보의 전 회장이었다는 점에서 이 책 표지에 적힌 <방일영 문화재단>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아직 학번이 어리니 진취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지 싶어 무시하고도 싶었지만, 수년 내로 역사교사가 돼 어린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은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가르치지나 않을까 가슴 한편이 답답해졌다. 친북반미가 대학가의 패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 연장선에서 그 동생뿐만 아니라 우리 후배들이 지금도 서점에서 어떤 책으로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역사인식의 새로운 물줄기를 환영한다

다행히 최근 들어 이러한 흐름을 염려하고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현대사를 다룬 책들이 잇따라 출판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물결은 한쪽으로 깎여 급해진 역사배우기의 물줄기를 완만하게 바꾸어 놓을 것으로 기대한다. 새로 나온 『해방전후사의 再인식』(이하 재인식)을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재인식’은 지난 20여 년간 학계의 부단한 연구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에서 제기된 주장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수정한 결과이다. ‘재인식’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학계의 연구 성과물을 대중에게 전달한다는 점에 착안한 듯하다. 필자는 ‘인식’세대는 아니다.

필자는 대학에 들어와서 『민중의 역사』『다시쓰는 한국현대사』(‘다현사’)『한국경제의 뿌리와 열매』등을 읽고 자란 한총련 세대다. 그러나 ‘인식’에서 주장한 ‘민족지상주의’와 ‘민중혁명 필연론’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 및 6.25 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이해’ 등은 아류의 책들에도 그대로 담겨있다. ‘인식’에 비한다면 『민중의 역사』나 『다시쓰는 한국 현대사』는 친북반미의 정점에 서있는 책이다.

극단적인 역사인식의 편향을 겪어본 경험에서 그 당시 나의 편협한 사고를 바로 잡아줄 지침서가 한 권도 눈에 띄지 않았던가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는다. 비록 친북반미 성향을 갖는다 하더라도 역사를 문명사적 관점, 비교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는 깨우침을 주지 않았을까 한다.

‘재인식’의 필자 중 한 명인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는 8-90년대 변혁운동진영에서 주장한 ‘식민지 반(半)자본주의 사회론’에서 ▲ 한국사회는 美 제국주의의 식민지이며 ▲ 분단의 책임은 이승만 정권에 있고 ▲ 남한은 친일청산을 잘못했지만, 북한은 잘했다 ▲ 남한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했으나 반(半)봉건사회를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문제들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재인식’은 ‘인식’ 류의 책이 민족이나 통일․ 혁명 등의 가치를 절대시하였으며, 연구자들이 연구 성과를 목적 실현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했다.

북한에 대해서도 애써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는 일침을 가한다. ‘재인식’은 북한경제의 뿌리가 일본제국주의의 ‘전시동원정책’임을 밝혀낸다. 북한의 친일청산의 본질을 밝힌 기무라 미쓰히코 교수의 논문도 주목을 끈다.

이정식 교수는「냉전의 전개과정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에서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의 본질과 국제정세에 대해 사료를 근거해 분석해낸다. 김일영 교수가 쓴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에서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허구성을 밝힌 것 역시 경청할 만하다.

그동안 이승만을 대한민국 대통령을 미국의 하수인으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인식에서 그의 실용주의적 사고가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는 평가도 흥미롭다.

다시 희망의 노래를 부르자

한국의 역사는 ‘피가 거꾸로 흐를 만큼’ 잘못되지 않았다. 온갖 잡동사니 사상이 엉켜서 출발은 불안했지만, 한반도에서 문명이 출현한 이래 전 세계에서 최대의 물질적, 정신적 위상을 구축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한의 체제가 남긴 것은 결국 수령절대주의와 지구상에서 가장 배고픈 인민의 삶일 뿐이다.

참여정부 들어서 우리는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는 식의 마녀사냥 같은 역사 인식을 줄곧 들어왔다. 해방 이후 50년 동안 우리 선배들은 무슨 잘못을 그렇게 많이 했길래 현재의 우리들에게 그토록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되고 비틀거리게 만드는 일군의 사람들 때문에 우리 사회는 지난 3년 동안 비생산적인 갈등만 겪어왔다. 이제는 오직 사실에 근거한 이성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조명하는 노력이 필요함을 느낀다.

‘재인식’은 책 1권의 대부분을 일제 식민지 시대를 재평가하는데 할애하였다. 친일파청산문제 등의 민족지상주의의 우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꼭 읽어봐야 할 부분이다. 역사청산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신화의 오류를 따끔하게 질책하고 있다.

책의 말미에 있는 김철 교수의 당부처럼 “증오와 원한은 잠시 동안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조만간 자기 자신을 부수는 독이 되고 마는데, 증오의 대상이 없으면 존재 이유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번 재인식의 출판으로 우리 젊은 세대도 피상적인 역사인식을 넘어섰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혁명이 매혹적이라는 생각과 함께, 급진주의가 가져오는 해악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좌우의 날개를 달 수 있지 않을까.

광화문 모 서점입구에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문구가 있다. 재인식을 통해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가 역사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본다.

류현수/ 북한인권학생연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