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협동농장과 국영공장에 시장가격이 반영된 생산비용을 선(先) 지급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경제관리 대책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처음으로 제시되는 새 경제조치다.
10일 평안북도 내부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달 말 ‘우리식의 새로운 경제관리 체계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 제목으로 이른바 ‘6·28 방침’을 내부에 공표했다. 본격적인 시행 날짜는 오는 10월 1일로 알려졌다.
앞으로 북한 협동농장에서는 현재 작업분조(分組) 단위(10~25명)를 4~6명 단위로 축소·관리하고, 작업분조에 따라 토지와 생산비용을 할당한다. 북한 당국은 협동농장이나 공장기업소, 각급 기관들이 보유하고 있는 유휴지(遊休地)까지 작업분조에게 맡긴다는 계획이다.
생산물은 국가와 작업분조가 일정비율로 나눈다. 국가는 ‘수매(收買)’ 형식으로 생산량을 가져가고, 작업분조 몫으로 남은 생산물은 분조원들에게 현물분배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지금까지의 농업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국가는 작업분조에게 필요한 생산비용를 선지급한다는 점과 더불어 생산비 책정이나 수확량에 대한 가격평가 과정에서 현실적인 시장가격을 반영한다는 점이 새롭다. 소식통은 “중요한 것은 ‘가변가격 제정’이다. (시장)현시세에 맞게 가격을 매긴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은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에 따라 협동농장에서 80전에 수매해 주민 배급소에서 8전에 판매하던 쌀(kg)을 각각 40원, 44원으로 인상했다. 그러나 현재 북한의 시장거래 쌀 가격이 북한 돈 4천원을 웃돌고 있어 당시 개혁은 유명무실해졌다.
공장기업소에도 이 같은 방식이 도입될 예정이다. 소식통은 “기업소의 경우 최초 생산비는 국가에서 ‘투자’하고, 그 돈으로 원자재를 사다가 생산, 판매하게되면 판매수입을 국가와 해당 기업소가 일정비율로 나눈다”고 말했다. 해당기업소는 분배된 돈으로 기업소 운영할 수 있다.
북한 당국은 협동농장 작업분조와 공장기업소에 선지급하는 생산비용을 ‘국가 투자’로 표현했다고 소식통은 말했다. ‘재원 및 자재부족→생산감소→수입감소→근로의욕약화→생산감소’라는 악순환 고리를 끊고 생산 사이클을 회복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풀이된다.
소식통은 “신의주 화장품 등 각 도마다 한 두개씩 시범 단위가 선정됐다”면서 “이 시범단위에는 조만간 국가 투자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태진 한국농촌연구원 부원장은 데일리NK와 통화에서 “집단영농방식의 근간은 허물지 않으면서 각 영농단위의 생산동기를 부추겨 국가 전체의 식량생산을 늘이겠다는 의도”라고 전망했다.
현재 북한의 농업관리 방식은 도(道) 농촌경리위원회가 생산 계획지표를 작성해 내각 농업성에 승인을 받으면 각 생산단위에 생산목표를 할당하는 구조다. 이후 농자재와 토지 사용료, 군대 지원금 등을 제한 나머지 생산량을 생산단위에 분배해 왔다.
그러나 탈북자 등에 따르면 국가가 농자재 사용 비용 등을 사전에 높게 책정하고 있기 때문에 수매가 끝나더라도 농장원에 돌아가는 몫은 제한적이다. 협동농장이 농자재를 자체로 조달할 경우에도 국가가 수매가를 올려주지 않기 때문에 농장원에 분배되는 몫이 적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국가 수매가격 현실화 조치는 “협동농장이 농자재를 시장에서 조달하면 그것을 (국가에서) 커버해 주겠다는 것”이라고 권 선임연구원은 풀이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벌써부터 이론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북한 당국이 전체 협동농장과 주요 공장기업소들의 초기 생산을 보장할 만한 재원을 확보하고 있을지가 미지수다. 또한 국가수매를 진행하는데도 막대한 초기 재원이 필요하다.
국가수매를 시장가격으로 하게 되면 배급할 때에도 시장가격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괜시리 곡물가격 인플레이션만 부추키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도시 노동자들의 임금 등이 현실화되지 않은 조건에서는 도시주민들이 식량을 구매하는 일이 더욱 여러워진다는 것이다. 만약 북한 당국이 시장가격보다 낮게 판매한다면 엄청난 재정적자를 각오해야 한다.
이 같은 흐름은 장기적으로는 물가 상승을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권 선임연구위원은 “시장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매가격 현실화’를 실시하겠다는 것으로 보이지만, 국가가 식량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암시장이 다시 활성화돼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만연된 상황에서 국가의 안정적 수매가격 관리가 쉽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수매가격을 현실화하더라도 시장가격보다 더 높게 쳐줄 수는 없다. 따라서 생산책임자들이 중간에서 수확물을 빼돌려 시장에 내다파는 현상이 빈번할 것이란 우려가 이어진다.
권 선임연구위원은 “물자도 부족하고 관료들의 부패가 만연된 상황에서 이런 류의 농업개혁 조치가 제대로 작동할 가능성은 낮다”며 “시장에 맡겨둔다면 모를까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분조관리제
1966년에 모든 협동농장에 도입한 제도로서 협동농장의 기층단위인 분조(10~25명)에 일정면적의 농경지와 생산도구 등을 주고 국가가 해당 분조의 정보당 수확량을 정하여 그 수행 정도에 따라 분배를 실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제도는 1996년 식량난 심화로 곡물 증산을 유도하기 위해 분조의 규모를 축소(7~8명)하고 분조의 목표 생산량의 초과분에 대한 현물 처분권을 부여하는 등 일부 내용을 바꾸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제도를 2006년 이후 축소하고, 개인밭 경작물마저 식량수매에 포함시키는 과거 전통적 농업정책으로 회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