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2일] “北, 미사일 쏠 돈으로 응원단 비용 충당하면 되지 않겠는가”

▶전날 북한 주민들이 청취한 대북 라디오 방송 중 주요 내용을 소개합니다.


<자유조선방송/7월 21일>


논평-미사일을 쏠 돈으로 응원단 비용을 충당하면 되지 않겠는가.


김정은 정권이 며칠 전에 있었던 남북 실무접촉 결렬 책임을 남측으로 돌리기 위해 연일 공세를 퍼붓고 있습니다. 실무접촉단장을 내세워 양측이 주고받은 대화내용을 공개하면서 잘 되던 회담을 마치 청와대가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깨졌다고 고아댔습니다. 일방적으로 퇴장해버린 데 대해서는 “실무적 필요에 따라 상세 사항에 대한 우리 측의 확인을 왜곡하며 문제 삼아 돌연 접촉 결렬을 선언하고 퇴장했다”는 듣고도 모를 아리송한 이유를 댔습니다. 하지만 이번 실무접촉 결렬이 무엇 때문인지는 너무도 뻔합니다.


한 마디로 북측은 과거에 했던 것처럼 북측 선수단과 응원단의 체류비용을 전부 부담해달라는 얘기고, 남측은 국제관례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지난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때 약 130만 달러, 2003년 대구 대학생체육경기대회 때는 90만 달러, 2005년 인천아시아육상경기대회 때는 약 20만 달러 전부 다 남측이 부담해 줬습니다. 이번에도 남측이 부담할 경우 약 150만 달러가량 든다고 합니다. 이렇게 남측이 부담해 주는 돈으로 공짜로 먹고 자고 응원하면서 김정은이 바라는 대로 적구 공작대 역할을 톡톡히 하겠다는 겁니다.


지난 시기 길가에 걸려있던 김정일 사진이 들어있는 플랜카드가 비에 젖는다고 울며불며 하는 모습을 본 남한 인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남한 인민들 속에서 세금을 왜 저런 사람들한테까지 써야 하는가에 대한 목소리가 높지 않았겠습니까. 게다가 요즘 거의 매일같이 미사일을 쏘아대는 김정은 정권입니다. 허공에 날려 보내는 쓸데없는 미사일에 퍼부을 돈이 있으면 350명이 오든 700명이 오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국제관례대로 자기네가 쓰는 돈은 자기네가 내야 하지 않겠냐 하는 것이 남측의 입장입니다.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돈을 대줬다지만 공연히 나쁜 버릇만 키워줬다는 것이 남한의 여론입니다. 한쪽으로 미사일을 쏴대고 다른 한쪽으로는 응원단을 보내겠다는 김정은 정권에게 남측이 미쳤다고 돈을 대 주겠다고 실무접촉에서 북측이 내놓은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겠습니까. 협상이라고 하면 양측이 서로의 입장이나 요구 사항들을 충분히 들은 뒤에 대화를 통해 의견 차이를 좁히면서 합의를 하는 과정입니다.


더군다나 이번 아시아경기대회는 체육경기입니다. 정치를 배제한 순수 스포츠 정신에 입각해 참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김정은 정권이 진정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원하고 아시아경기대회 참가를 바란다면 좀 더 진중한 자세, 성의 있는 자세로 협상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북한개혁방송/7월 21일>


안찬일의 시사논평-6·25남침전쟁에 대한 중국의 태도변화


조선개혁방송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조선개혁방송 시사논평은 “6·25 남침전쟁에 대한 중국의 태도변화”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6·25 조선전쟁을 보는 중국의 시각이 크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선즈화(沈志華) 중국 화둥(華東) 사범대 교수는 남조선에서 열린 학술회의를 통해 “3~4년 전부터 ‘한국과 미국의 북한 침략으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기존 입장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아직 북조선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는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선 교수는 설명했습니다. 그는 중국 정부가 북한의 남침설을 공식 인정하게 될 시점은 중국과 북한이 공개적으로 분열하는 때가 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선 교수는 지난달 24일 서울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코리아정책연구원과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이 공동 주최하는 ‘6·25 남침의 진실’ 심포지엄에서 ‘한국전쟁 시 북조선에 출병한 중국의 심층적 원인 분석’이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6·25전쟁에 중국군만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분단의 아픔은 없을 것이란 아쉬움이 큰 가운데 열린 이날 학술심포지엄에는 많은 남조선 학자들과 권영해 전 안기부장 등 고위관료 출신들도 참가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선 교수는 ”중국에서도 전쟁을 보는 입장이 달라지고 있다. 지난 3~4년간 중국 정부나 관방 언론을 보면 ‘남조선과 미군의 북한 침략으로 발발했다’고 하던 과거 주장을 되풀이하는 언급을 찾기 어렵다. 이는 분명한 변화다. 물론 북조선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현재 중국이 북조선의 남침을 인정하지 않는 건 중·북 관계를 고려해서다. 중·북 관계가 공개적으로 분열할 때 중국은 북한의 남침설을 공식 인정하게 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계속하여 선 교수는 “중국에선 6·25전쟁을 줄곧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불렀다. 지난해 6·25전쟁 발발 63주년 즈음해 중국 외교부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대신 ‘조선전쟁’이란 표현을 썼다.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에 ”항미원조란 말에는 중국의 역할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다. 중국이 전쟁에서 승리해 국제적 지위가 올라갔다는 등 중국의 자부심을 고취하겠다는 뜻이다. 조선전쟁이라 부르기 시작한 건 중국의 역할을 부각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풀이된다”고 답변했습니다. 


또 선 교수는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지 않다가 1950년 1월에 가서야 승인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스탈린이 생각을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태평양에 진출할 수 있는 기지를 확보하려는 스탈린의 야심이 작용했다. 1950년 1월은 마오쩌둥이 소련을 방문해 중·소 동맹을 협의할 때다. 이 당시 중국 뤼순(旅順)항을 소련이 사용하는 문제 등이 도마에 올랐고 소련은 한반도에서 긴장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6·25전쟁이 터져 위기 국면이 조성되면 뤼순항을 계속 이용할 수 있고, 또 만일 김일성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경우에도 한반도에 기지를 세울 수 있다고 본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이 참전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갖게 된 것인가?”라는 질문에 선 교수는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안 된 50년 7월 초에 벌써 파병 의사가 있었다. 중국은 7월 7일 국방회의를 열고 25만 5,000명 규모의 동북변방군 조직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앞서 중국은 이미 병력을 보내 북한을 도울 뜻이 있음을 소련에 알렸다. 마오쩌둥도 7월 19일 김일성에게 중국군을 북한에 파견할 수 있다고 밝혔다”고 답변했습니다. 


계속하여 “중국의 참전은 전쟁 발발 4개월 만인 10월에야 이뤄졌다.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선 교수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은 이미 두 차례의 좋은 파병 기회를 놓쳤다. 첫 번째 기회는 북조선이 남쪽으로 진격할 때였다. 당시 중국은 미군이 북한군 후방으로 역습하는 전술을 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예측하고 병력 지원을 제안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이때 한반도 해안으로 중국군 파병이 이뤄졌다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기회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북한이 패퇴하기 시작할 때다. 중국은 다시 파병을 제안했다. 그러나 역시 소련의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 중국군이 신속하게 파견됐다면 미군은 38선에서 더 이상 북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답변했습니다. 


또한 “스탈린은 왜 중국의 파병 제안을 승인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선 교수는 “중국이 파병해 수십만 군대가 북한에 진주한다면 북한은 중국의 영향권 안에 들게 된다. 이는 북한을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 한 소련으로선 원치 않는 일이었다”라고 답변했다.


“마오쩌둥이 참전을 강행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네 가지 이유가 얽혀 있다. 첫째는 사회주의 진영의 국제 분업에 따른 책임과 의무다. 중국 공산당은 아시아 혁명을 원조하는 건 일종의 책임이자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둘째는 대만 문제로 촉발된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보낸 것이다. 마오는 이를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는 행위로 보고 격분했다. 셋째는 중국 변경에 대한 위협을 고려해서다. 모택동은 6·25전쟁의 불길이 중국 경내로 번지면 스탈린이 중·소 동맹을 근거로 수십만의 소련군을 중국 동북지역으로 보낼 것이고, 이 경우 한 번 들어온 소련군을 다시 소련으로 돌려보내는 게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넷째는 중·소 동맹을 공고히 해 중공 정권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다. 이 때문에 마오는 참전을 결정하면서 ‘미국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말했습니다.  


끝으로 선 교수는 중국군이 38선까지 진격한 51년 1월에 유엔이 정전협상을 제의했지만 중국이 거절함으로써 전쟁이 53년 7월까지 지속됐고 이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착오라고 지적하면서 중국이 거절한 이유에 대해 ”두 가지다. 하나는 마오쩌둥의 정세판단 착오다. 마오는 미군의 반격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다른 하나는 스탈린과 김일성이 유엔의 정전협상 제의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답변했습니다.


선즈화 교수의 이와 같은 증언은 6.25남침전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칩니다. 다음 시간을 또 기다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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