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증언] 98년 단천열차사고 최대 1500명 사망








함경남도 단천시는 함남과 함북의 도 경계에 위치한 인구 30만의 해안 도시다. 단천시는 세계적인 마그네사이트 광산인 용양광산과 연, 야연광산인 검덕광산으로 유명하다. 필자는 직업상 검덕광산에 자주 출장을 갔었다.

단천시 금골동과 백금산동에 있는 검덕광산과 용양광산은 이미 일제 강점기 시기 개발된 광산으로 캐낸 광물을 단천항으로 운반하기 위해 검덕선 철길을 놓았다. 이 구간을 단천-금골행 통근열차가 다니고 있다. 하루에 두 번 운행하며 아침 7시와 저녁 8시에 단천과 금골에서 각각 출발한다.

1998년 11월 19일 밤 8시, 나는 금골동(검덕광산)을 가기 위해 검덕행 열차에 올랐다. 보통 3시간 정도면 금골역에 도착하지만 정전이 되는 날이면 2-3시간 더 늦어지곤 했다. 그 날도 1시간 정도 연착되면서 올라가던 열차가 이파역을 떠나던 중 전기가 끊겨 열차가 멈췄다.

공포에 질린 30분

열차가 멈추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라 사람들은 놀라지 않고 기다렸다. 1시간 정도 지나 전기가 오자 기관차는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고 했다. 그런데 차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기관사가 견인기의 힘이 약해 후진하여 이파역에서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이 생겼다. 멈춰야 열차가 점점 더 속도를 내며 뒤로 달리는 것이 아닌가!

이때서야 사람들은 열차가 제동을 못하고 거꾸로 달리고 있음을 알았다. 객실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뛰어 내리려고 차 문으로 뛰어나갔고 서로 난간을 붙잡고 아우성을 쳤다. 이미 뒤꼬리가 된 기관차는 탈선하여 날아가 버렸다.

열차는 마치 롤러 코스터처럼 무서운 속도로 달렸으며 굽이가 심한 곳을 지날 때마다 맨 뒤의 객차가 하나씩 철길 밖으로 떨어져 굴러 나갔다. 뒤에 알았지만 열차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다.

열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내는 무시무시한 굉음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나자 단천역 근처 2km 전방에서 기적적으로 열차가 멈췄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2-3분 지나자 모두 ‘살았다’며 만세를 불렀다.

이파역에서 단천역까지는 열차로 2시간 30분 거리인데, 30분만에 멈춰 선 것이다. 그 30분 동안의 공포는 30년이 걸린 것 같았다. 8개의 객차 중 4개가 떨어져 나가고 4개만 남았다. 전기 기관차와 4개의 객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사망했다.

필자는 검덕광산으로 가는 화물자동차를 얻어 타고 다시 올라갔다.

가는 도중 사고현장에 들렀다. 함께 가던 일행 중 사고열차에 탔던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러 가는 사람이 있었다. 이파, 증산, 동암, 여러 곳으로 굴러 떨어진 객차를 찾아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굴러 떨어진 객차는 부서져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함경도 추위는 11월이면 이미 얼음이 두텁게 언다. 객차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시신은 이미 얼어 있어서 사망 직전 모습 그대로 있었다. 시신들은 찾으러 오는 가족들을 위해 시신을 남성과 여성, 노인, 어린이 등으로 분류해 놓았다.

사망자 500~1500명, 얼어죽은 사람도 많아

특히 철교 아래로 추락한 객차 사람들은 전부 사망했다. 시신수습도 어려웠다. 검덕광산에서 나오는 뿌연 정광 찌꺼기 때문에 물속이 전혀 보이지 않고 떠내려간 사람도 많았다.

사람들은 이날 사망자가 1천 5백명 정도 된다고 말했다. 철도 관계자들은 5백명 정도라고 말했다. 사망자 대부분이 여성이었는데, 장사하기 위해 검덕에 감자를 구입하러 가는 주부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무더기로 굶어죽던 극심한 식량난 시기(북한당국은 책임회피를 위해 ‘고난의 행군 시기’로 표현한다)에 많은 북한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보따리 장사에 나섰다.

필자는 죽은 사람들을 보며 과연 얼마나 더 죽어야 ‘고난의 행군’이 끝날 것인가를 묻고 싶었다. 강물에 빠진 객차를 제외하고 나머지 3개 객차의 사망자는 늦장 대처 때문에 사망한 것이다. 당시 검덕지구의 밤은 영하 10도가 넘었다. 새벽 2시에 사고가 났으나 구조대는 날이 밝아 아침 8시가 넘어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추락한 객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 즉사하지 않은 사람들은 열차 밖으로 나온 후 전부 얼어 죽었다. 사고 직후 3시간 안으로 대책을 취했으면 절반 이상은 구할 수 있었다.

굶어죽고 얼어죽는 상황에서도 김정일은 아버지의 시신을 치장하는데 수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열차사고에 대비한 변변한 구조대도 없고 전문구조 장비 하나 없는 나라가 강성대국을 부르짖고 있다.

이 내용을 알고 있는 유가족들은 김정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끔찍했던 검덕행 열차사고는 필자가 탈북한 주요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