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홍 칼럼] ‘北인권에 헌신’ 윤현 이사장님의 영면을 기원한다

지난 2010년 12월 1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세계인권선언 기념식에서 고(故) 윤현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右)이 ‘2010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포장을 수여받고 있다. /사진=연합

어제(6월 3)로 윤현 이사장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 꼭 일 년이 되었다연로하셔서 활동 일선에서 물러나신 지는 이미 여러 해가 되었지만윤 이사장님이 북한인권운동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이제 북한인권운동의 한 단계가 마감되었다는 생각이 든다게다가 진보정권 집권 후 북한인권운동의 현 상황을 돌아보면 더욱더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나는 작년 연말에 <북한인권시민연합>으로부터 1주기 추모집에 추모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나 큰 줄거리를 써놓고는 외국에 산다는 핑계로 이래저래 퇴고를 미루다가 시간이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이 글로 박범진 이사장님이나 김영자 사무국장님께 추모집 문집 글을 못 쓴 것을 용서받고자 한다.

작년 6월 윤현 이사장님의 부음을 일본의 오사카에서 들었다. 2018년 9월 말부터 1년 예정으로 일본에 체류하면서 공부하던 처지라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다만 지난 20년 이상 북한 동포들의 생명과 인권을 위해 전념하신 이사장님의 뜻을 돌아보며 하늘나라에서 영면하시길 기원할 뿐이었다. 마침 오사카는 윤 이사장님이 태어나시고 유년기를 보내신 곳이라서인지 이사장님과의 20년의 기억이 더욱 떠올랐다.

윤 이사장님과의 추억을 생각하다 보니 내가 발행인을 맡았던 잡지 <시대정신> 1999년 9~10월호에 윤 이사장님과 진행한 인터뷰가 있었다. <시대정신>은 1980년대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일단의 활동가들이 21세기를 맞으며,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20세기적 낡은 이념을 비판하고, 극단적 민족주의를 극복하며, 무엇보다도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실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담아 1998년 가을에 창간한 잡지였다.

나는 잡지 일과 더불어 당시 국내에서 가장 앞서서 북한인권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북한인권시민연합>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때때로 시민연합 사무실에 들려 윤 이사장님으로부터 북한인권운동에 관련된 이야기도 듣고, 본인이 과거에 경험했던 여러 일에 대해서도 듣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자신의 젊은 시절에 관해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인터뷰 중에는 윤현 이사장님이 젊은 시절 공산주의자로서 전남 순천지방의 좌익 학생운동 리더였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과거에 이사장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20년 넘게 흐른 세월 속에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인터뷰를 다시 읽으면서 기억이 새삼 되살아났다. 인터뷰에는 자신의 기대와 전혀 달랐던 인민군 치하를 겪으면서 현실을 깨닫게 되고, 또 국군이 들어와 좌익 인사들을 처형하는 것을 목격하고, 본인도 목숨을 잃을 뻔한 과정을 겨우 넘기고 살아남으면서 이데올로기의 허무함을 깨닫고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는 내용도 나온다.

윤 이사장님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20대 질풍노도의 시기를 사회주의를 신봉하며 살았다. 대학 시절에는 학교 공부는 팽개친 채 학생운동에만 열중했고,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해서 감옥에도 갔었다. 출소 후에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의 주력군인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서 신분을 속이고 공장에 위장 취업해 용접공, 인쇄공, 철도 기능직 노동자로 10년 넘게 노동운동을 했다. 20대 말인 1989년에 있었던 중국의 천안문(天安文) 시위를 중국 인민해방군이 탱크로 진압하는 장면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처음으로 사회주의에 의문을 느꼈고, 1990년대 초반 구(舊)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 전환과정을 지켜보면서 결국 급진 혁명적 사회주의로부터 작별하게 되었다.

윤 이사장님은 신학대학원을 마치시고 짧은 목회활동을 하셨지만, 본격적으로는 인권운동의 길로 들어서셨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들어서고 정치적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를 설립하고 전무이사를 맡으시면서 인권 수호의 중요한 역할을 하시게 된다. 구속된 양심수를 옹호하고 그들의 석방을 위한 구명활동 등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셨다. 웬만한 사람은 이런 활동을 하다 보면 정치적 유혹에서 자유롭기 어려운데, 정치에 휩쓸리지 않고 인권의 길을 일관되게 걸으셨다. 윤 이사장님은 한국 인권운동의 역사에서도 이름이 남을 일을 하셨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당시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북한의 인권문제를 선구적으로 제기하셨다. 1996년에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을 창립해 북한인권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적 활동을 시작하셨다.

윤 이사장님이 한국의 인권을 옹호하는 엠네스티 활동에서 북한인권운동까지 오신 데에는 공산권 국가에 대한 연구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부터 KBS 사회교육방송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 공산주의 사회가 그들이 주장하는 바의 이상사회가 아니라 부정부패, 권력 남용과 횡포가 극에 달한 사회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북한 역시 소련을 모델로 만들어진 사회로서 의당 소련과 같은 문제가 있는 사회라고 간파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인권운동가, 연구자들이 힘을 합해 탈북민들을 구출하고, 매년 북한인권국제회의를 개최해 국내외에 북한인권 실상을 전파하고, 그 해결을 위한 선도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나도 당시 일반 회원으로서 지금 을지로 6가의 국립의료원 내에 있던 스칸디나비아 클럽에서의 월 발표회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인권 문제에 관해서 좀 더 깊이 있는 지식을 얻게 되고, 발표자와 토론자로 참석했던 여러 분야의 학자나 전문가들, 탈북민들과 교류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1999년 12월에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창립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창립된 1996년, <북한민주화네트워크>가 창립된 1999년 이래 20년이 훌쩍 넘게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진행해 왔지만, 기대와 다르게 북한의 현실은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윤현 이사장님을 비롯한 초기 운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이 있었고 그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라고 믿지만, 현실의 변화가 더딘 데 대해서는 인간인지라 마음이 편치 않다. 게다가 이른바 인권을 표방한 정부가 들어선 뒤로 역설적으로 북한인권에 대한 무관심이 확산된 현실은 더욱더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물론 여러 어려움에도 지난 20년 동안 성과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윤 이사장님을 비롯한 선구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북한의 인권실상은 이제 세계가 다 아는 문제가 되었다. 모르기 때문에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할 수는 없다. 운동의 첫 세대들이 이루어냈던 성과에 토대하되, 이제 젊고 창의적인 사고를 가진 연부역강한 활동가들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견지에서 해답을 모색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것이 북한인권운동을 최초로 출발시켰던 윤현 이사장님의 유지를 받드는 일일 것이다. 젊은 활동가들의 새로운 역할을 기대한다.

윤현 이사장님은 비록 가셨으나, 저 세상에서도 북한동포들의 생명과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북한인권 활동가들을 격려하고 지켜봐 주실 것이라 믿는다. 본인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지만 마침내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모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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