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버려진 아이들 2부] 애육원서 사라진 남철이

[어느 필사원의 사건일지] 청진에서 찾은 둘째 아이, 그러나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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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육원에 보내진 아이들


평양육아원
북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015년 1월 1일 고아원인 평양육아원·애육원을 방문한 모습. / 사진=조선중앙통신

언니는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속에서 둘째 아기를 낳았다고 말했다.

언니가 이혼할 때 아기는 뱃속에서 막달을 잡혀 있었다. 화가 나서 산원에 가서 아기를 없앨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새 생명에 대한 사랑은 멈출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아기를 낳았는데 점점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언니는 정신이 없어 아기들을 돌보지 않았고, 집안 물건들도 사정없이 다 마스고(부수고) 심지어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에게도 달려들어 행패를 부리고 때리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큰아버지는 언니의 일로 마음고생을 하다가 갑자기 어느 날 뇌출혈로 쓰러졌다. 큰아버지는 얼마 버티지 못하시고 이내 돌아가셨다.

혼자서 딸의 정신 상태를 두고 볼 수 없었던 큰어머니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아기들을 애육원에 보내고 언니는 49호 병원으로 보내기로 결심했다. 언니는 정신이 없어 그 시간들에 대한 기억이 없고 훗날 정신이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언니는 평안남도에 있는 어느 정신병원으로 치료를 떠났다. 언니는 그 병원에서 몇 년간 있다가 병이 호전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정신이 돌아와서야 두 아이가 생각났다고 한다. 퇴원한 날, 집으로 돌아오니 아이들이 없었다. 나이 70이 넘은 큰어머니는 혼자서 아이들을 돌볼 처지가 안 되어 남일이와 남철이를 평성에 있는 애육원에 맡겨버린 것이었다.

언니는 집에 돌아와서도 좀 낫긴 했지만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아이들을 돌볼 형편이 안 되었지만 매일같이 아기들이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큰 어머니가 언니를 어르기 시작했다.

“애 둘 중에 남일이만 먼저 데려 내오자. 남일이는 올해 학교 가는 나이니까 아무래도 데려와야 하고…. 남철이는 아직 어리니까 몇 달만 좀 더 맡겨두자. 지금 형편에서 두 애를 다 돌보자면 어려울 것 같다. 네 몸부터 먼저 추세워야 할 것 같다.”

언니는 다시 병이 도질까봐 겁이 났고 큰어머니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남일이를 데리러 애육원으로 떠났다. 애육원으로 떠나는 날, 언니는 몸이 허약해서 떠나지 못하고 큰어머니만 떠나갔다.

그날 애육원에서는 눈물 나는 광경이 벌어졌다. 큰어머니가 형 남일이만을 데려가려는 것을 알고 남철이가 눈물을 터뜨렸다.

형제는 애육원에서 서로 의지하며 노상 함께 붙어 다녔다. 남일이는 늘 동생의 손목을 잡고 다녔다. 그들은 떨어진 날이 별로 없었다. 잠도 함께 자고 먹을 것이 생겨도 나눠먹었다. 그런 형제가 떨어지자니 세 살인 남철이가 발버둥 치며 울었다.

결국 남철이 때문에 큰어머니는 그날 저녁 떠나지 못하고 남철이를 옆에 누이고 하룻밤을 보냈다. 잠들기 전 남철이는 큰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졸랐다.

“할머니, 나도 집으로 데려가 줘. 엄마 보고 싶어.”

남철이는 태어나서 6개월 만에 애육원으로 옮겨져 엄마의 얼굴을 모른다. 아빠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른다. 남일이가 엄마 얘기를 자주 하고 할머니가 엄마에 대해 자꾸 얘기해주니 그것으로 엄마를 익힌 아이였다.

밤새껏 조르는 아이에게 할머니는 남철이의 손가락을 꼽았다 폈다 하면서 사정을 했다.

“남철아, 할머니가 이렇게 몇 달만 있다가 꼭 데리러 올게. 네 엄마가 아직 아파서 너를 돌볼 처지가 안 되서 그런다. 꼭 데리러 올게.”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밤새껏 남철이를 다독였다.

큰어머니는 애육원 원장도 만났다.

“남철이를 6개월만 좀 더 봐주세요. 그때면 아마 애 엄마가 다 회복될 것 같아요. 애를 절대 다른 곳에 보내지 마시고 잘 부탁해요. 꼭 찾으러 올 테니 남철이를 절대 다른 데 보내시면 안돼요”라고 당부했다.

큰어머니가 남일이 손을 잡고 애육원을 떠나 올 때 남철이는 금방까지 할머니와 한 약속을 잊고 울며 따라나섰다. 나이 지숙한(지긋한) 보육원이 애를 안고 어르는 모습을 보며 떠나왔다. 큰어머니는 문밖을 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남철이의 울음소리가 귓전에서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다시 6개월이 흘렀다. 그때는 언니가 회복기에 들어서서 남철이를 데리러 큰어머니와 남일이까지 데리고 애육원으로 떠났다.

애육원에 들어서서 남철이가 있던 곳으로 왔는데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허겁지겁 원장에게 뛰어가 물어보니 자기도 없는 사이에 누가 아이를 키우겠다고 데려갔다는 것이었다. 누가 데려 갔느냐고 물어보니 애육원 측에서는 딱 잡아떼고 대답을 주지 않았다. 일단 아기를 데려가면 그것은 비밀 보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육원 명단에도 누가 데려갔는지 주소가 없었다.

그 순간 언니는 다시 정신이 돌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아이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우선 아기를 데려간 출처를 알아야 했다. 언니는 당 간부들을 내세워 애육원 명단을 파헤쳤지만 정확하게 남아있는 명단이 없었다. 남철이와 비슷한 이름에,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을 어림짐작으로 찾아보니 수십 명이었다. 그때부터 언니는 그 명단을 찾아들고 전국을 떠돌며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언니의 결심은 단호했다. 자기가 살아있는 한 남의 손에서 아이가 자라는 불행을 절대 두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떠나온 곳에서 아이와의 상봉


언니는 남철이라는 이름, 남철이와 비슷한 연령의 아이들이 있는 곳은 다 찾아다녔다.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자니 여비는 얼마나 들었을 것이며 속은 얼마나 탔을 것인가. 언니는 평안남북도, 황해남북도, 함경남북도를 비롯한 전국을 떠돌았다. 그렇게 1년을 거의 보내던 중에 청진에 와서 남철이와 상봉했다.

언니는 아이들을 데려간 부모들을 만나기 전에 아이들의 얼굴부터 확인하기에 애썼다. 청진시내의 한 마을에서 남철이와 비슷한 아이를 확인했다. 아이는 마을 어귀에서 여자애와 놀고 있었는데 나이도 비슷했고 얼굴도 형을 닮은 모색이 나타났다. ‘내 아이구나!’ 하는 것을 대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언니는 그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네 이름이 뭐냐?”

“내 이름은 충성이에요.”

아이가 대답했다. 언니는 이름이 다르다는 생각에 순간 섬찍(섬뜩)했지만 자기 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네 본래 이름이 남철이 맞지? 형의 이름은 남일이고, 그리고 할머니가 애육원에 자주 찾아왔던 생각이 나지?”

아이는 할머니라는 말과 형의 이름이 나오자 정신을 차린 듯이 얼굴을 빤히 쳐들고 언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대번에 알아들었다.

“우리 할머니 알아요? 우리 형님도요? 난 애육원에서 이름이 남철이었어요. 새엄마, 새아빠가 충성이라고 새로 지어주었어요. 원수님의 충직한 아들이 되라고 그렇게 지었대요.”

남철이는 똑똑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데 얼굴에는 수심이 끼어있었다.

그 옆에 앉아있던 처녀애도 언니를 쳐다보면서 속닥거렸다.

“아줌마, 내 이름은 효심이에요. 나도 본래 이름은 새별이에요, 나도 언니랑 헤어졌어요.”

두 애의 말을 들으며 언니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병원으로 떠나갈 때 6개월 되었던 아이는 벌써 다섯 살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남철이를 확인한 다음, 언니는 아이를 데리고 남철이가 사는 집을 찾아 들어갔다.

아파트의 구석구석이 아직 채 정리되지 못한 것을 보니 새로 지은 아파트 같았다. 문을 두드리자 30대 초반의 젊은 여인이 나왔다. 여인의 옆에는 세 살이 될까 말까한 아이가 바지자락을 잡고 서있고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남철이의 새 엄마가 낳은 아이들인 것 같았다. 자기가 낳은 아이 두 명에 또 두 아이를 데려다가 양육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맙다는 생각이 뼈끝까지 갈마들었다. 이런 좋은 여인들이 있어 자기 같이 당분간 엄마의 자격을 잃은 여자들이 편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깊숙이 머리 숙여 인사를 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평양에서 왔어요. 남철이 친엄마입니다.”

언니는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접 말을 했다. 순간 여자의 눈빛이 팽 하고 달라졌다. 그 여자는 언니를 방으로 안내했다. 집안에서는 아직 콘크리트 냄새가 나고 집이 아직 잘 꾸며지지 않은 상태였다. 방은 한가득 지저분했다. 여자가 방 한 가운데를 헤치고 앉으라고 했다.

언니는 그 여자에게 그동안 있은 사연을 이야기 해주고 아이를 버린 것이 아니라 당분간 애육원에 맡겼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자초지종 설명했다.

언니의 말이 끝나자 그 여자는 버럭 화를 냈다.

“애를 절대 돌려줄 수 없어요. 그동안 애를 어떻게 키워왔다고… 이제는 정도 들고 다 자래워(키워) 놓으니 이제 와서 돌려달라니요, 그럴 수 없어요. 당장 돌아가요. 복잡하게 놀면 시(市) 당에 신고하겠어요.”

여자는 그렇게 으름장을 놓고 언니를 나가라고 밀쳐 내보냈다. 문은 쾅 하고 닫혀버렸다.

언니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남철이의 새엄마를 설득하려 나섰다. 그 여자는 언니가 정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하자, 이 일이 혹시 이 여자 편으로 기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 당시 북한 돈으로 10만 원을 내놔야 아이를 돌려주겠다는 망언을 했다.

10만 원이면 그때 시세로 아파트 2채 값에 달했다. 남철이가 그 집에 머물러 있은 지는 1년 정도 밖에 안 되었지만 그 여자를 뚫고 들어갈 틈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언니에게는 당시 여비밖에 없는 상태였다.

치열한 싸움은 언제 끝날지 아득한 상태였다. 그때부터 그 집에서는 남철이를 밖에 내보내지조차 않았다. 밖에서 아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언니는 아이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때부터 언니는 아이를 찾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3부에 계속)

* 편집자주 : 북한 보안서(경찰서) 등지에는 ‘필사원’이 있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현지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를 당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데일리NK는 필사원 업무를 담당했던 한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 북한 체제의 속성을 파헤치고자 한다.

다만 본지는 일반적 기사체를 고집하기 보다는 소설적 기법을 사용해서 독자들이 사건의 흐름 및 북한 주민들의 심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