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버려진 아이들 1부] 언니의 파탄난 가정생활

[어느 필사원의 사건일지] 평양경비대 군관 형부의 비위-급작스런 이혼에 정신병

북한 평양에 위치한 고아원 모습. /사진=데일리NK

한때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1990년대 중후반 대량아사시기)이 시작되면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많았다. 국고가 텅 비어있는 상태에서 애육원이나 중등학원(고아 수용시설)으로 그들을 전부 다 데려다 키운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럴 때 주민들 속에서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양육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많았다.

훌륭한 일이었다. 북한 정부는 이들을 지지해 주고 애국적인 주민으로 내세워주었으며 그들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일반 주민들에게는 배급을 주지 못해도 이들에게는 가족의 배급까지 전부 주었고, 애로도 적극적으로 풀어주었다.

정부의 배려에 이를 악용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나쁜 마음을 품고 정부를 기만하는 행위들이 적발되기도 했다. 부모 없는 애들을 키워준다고 데려다가 성추행하는 자들, 아이들을 불모로 가둬두고 정부의 혜택을 받으려는 자들, 아이들을 키워준다는 미덕을 이용하여 조선노동당 입당과 같은 정치적 이윤을 노린 자들, 형형색색의 인간들의 자태가 드러났다.

아이와 함께 거리 산책을 하는 부부, 아내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채로 서 있고 남편이 아이를 챙기고 있다. /사진=데일리NK

뜻밖에 나타난 언니


평양에 아빠의 의형제 되는 분이 있었다. 사실을 따져보면 아버지와 같은 성씨를 가진 한 집안 사람인데 촌수가 아득히 멀어 남이나 다름없는 친척이었다. 그분은 형제가 없는 무녀 독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할머니는 ‘큰아버지네는 씨가 밭은 집’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분과 우리 아빠는 어릴 적부터 한 마을에서 살아오면서 의형제를 맺었다. 우리는 아빠보다 두 살 위인 그 분을 큰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우리 가족은 평양에 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큰 아버지네 집에 들러서 며칠씩 묵곤 했다.

큰아버지 자식 대에는 번창해서 딸 세 명에 아들이 한 명으로 자녀가 넷이었다. 세월이 흘러 언니들이 모두 시집을 갔지만 평양과 청진(함경북도) 사이는 아득한 곳이어서 결혼식 같은 곳에 다녀올 생각을 못했다. 더욱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어 철도를 비롯한 경제의 여러 분야가 구실을 못하면서 사람들은 결혼식이나 제사 같은 것이 있다고 해도 가볼 엄두를 못 냈다.

나는 결혼을 하고 평양에 한 번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당시 두 살 되는 애기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중앙 문답식 경연에 참가하게 되었다. 경연은 평양에서 있었는데 보름간을 평양에서 보내며 큰아버지네 집에 들렀다. 언니 오빠들 모두 결혼해서 살림을 나가고 둘째 언니네 부부가 큰아버지 댁에 들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둘째 언니는 나보다 한 살 위였고, 상업대학을 졸업해 시내의 봉사(서비스)부문에서 관리일군(일꾼)을 하고 있었다. 형부는 평양에 있는 경비대 군관이었다. 그들에게는 우리 아기보다 먼저 낳은 세 살짜리 남일이가 있었고 부부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큰아버지, 큰어머니도 사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참 애틋하고 부러움을 사게 하는 부부였다. 훗날 집에 돌아와서 언니네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에게도 했던 기억이 난다. 언니와 형부의 모습을 통해 지방 사람들이 모르는 평양시민들의 정서와 내면적인 향기를 느끼게 해주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언니가 5년 후인 2003년 뜻밖에 우리 집에 나타났다.

30대 후반인 언니의 머리는 늙은 여자같이 하얗게 서리가 내렸고, 풀어헤친 듯이 흐트러져 있었다. 핏기가 없고 볼은 쏙 꺼져 들어가 볼품없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나를 보며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내성적이며 고운 웃음을 지을 줄 아는 평양 여성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나는 언니에게 굉장히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판단했다. 반가우면서도 의문이 앞섰다. 그 고운 얼굴은 어디가고 왜 이렇게까지 상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앞섰지만 당장 물어보기가 거북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였다. 언니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많이 정리된 마음인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꺼져 내린 마음이라 할까?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파탄 난 가정생활, 형부의 비현실적인 행위


“가정이 파탄 났어.”

언니는 첫 말을 이렇게 뗐다. 힘든 순간을 견디고 있는 지금이지만 쓸쓸한 미소를 띠우고 청순한 모습으로 말했다. 익숙한 그 웃음은 언니의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아픔의 메아리처럼 가냘파 보였다. 내 가슴은 그저 알알하기만 했다.

똑똑하고 직업도 좋은 언니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저 분하기만 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언니의 다음 말을 또 기다렸다. 언니의 입에서는 바람이 부는 것 같은 한마디가 또 흘러 나왔다.

“그 사람이 바람났어!”

언니의 말이 지나가자 순간 집안이 괴괴해졌다. 엄마도, 아빠도, 나도 기가 막혀 숨을 딱 멈춰버린 것이었다. 이럴 수가? 하는 눈빛이 엄마, 아빠의 얼굴에서 흐르고 나는 그렇게 고상한 교양을 많이 받는 평양경비대 군관이 그런 남자라니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나는 언니의 남편을 무척 좋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평양에 가서 본 형부의 모습은 순간도 지칠세라 언니를 좋아하던 모습이었다. 언니와 농담도 꽤 많았고 낄낄 웃기도 잘 했다. 단숨에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동안 언니가 겪은 현실은 너무 가혹했다.

언니의 남편, 평양경비대 군관인 그 사람은 첫 아기인 다섯 살 남일이, 그리고 언니의 뱃속에 있는 둘째 아기를 두고 부대에서 바람을 피웠다. 중대 정치지도원인 형부는 처녀군인들을 대상으로 성추행을 일삼던 끝에 끝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처녀군인들을 유혹해서 입당시켜주겠다면서 그들의 몸을 요구했다. 그는 여러 명의 여자 군인들을 성추행했고 그중에 한 처녀군인은 임신까지 한 상태였다. 부대에서는 이미 전부터 눈치를 채고 형부에게 여러 차례 주의를 주었지만 성품이 단정하지 못한 그는 끝내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언니는 남편에게 이런 일이 생길 때까지 잘 몰랐다고 했다. 일을 다니며 아기를 키우느라 바쁜 시간이 흘렀다. 거기에다가 남편은 부대생활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고 지냈다. 신혼생활 때는 바빠도 집에 자주 들어오던 남편이었다. 근래에 와서는 점점 집과 거리가 먼 사람처럼 때때로 들어왔다. 그냥 바쁜 줄로만 알았다.

결국 형부는 모든 행위가 탄로 나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경비대에서 쫓겨나 제대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평양 여자들은 외지사람과 결혼하면 평양 거주에서 떨어지고 시골로 내려가야 했다. 언니도 그 사람의 고향인 황해도 농촌으로 내려가야 했다. 설사 이혼을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고향인 황해도 거주자로 변한다.

언니가 결혼할 때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이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저들이 좋다니 별수 없이 결혼이 성사되었고, 제대 후에도 어떻게 하나 평양에 거주시켜 데리고 있을 잡도리를 했다. 그만큼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언니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언니는 그 사람의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혼선고를 했다. 하지만 형부는 뻔뻔하기 그지없이 이혼을 해주지 않겠다고 악을 썼다. 시골 농촌으로 언니를 끌고 내려갈 잡도리를 했다. 하지만 언니 쪽에서 들고 일어났고, 언니는 그 사람을 따라 내려가지 않았다. 몇 개월간의 싸움 끝에 끝내 이혼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언니를 다시 평양거주로 돌려놓는 일이 쉽지 않았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뛰어다니며 다시 언니를 평양거주자로 돌려놓았다. 형부는 아이들도 거둘 형편이 못 되어 언니가 양육하게 되었다. 하지만 언니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지쳐버렸다. 언니는 가문에 없는 정신병을 앓게 되었다.

(2부에 계속)

* 편집자주 : 북한 보안서(경찰서) 등지에는 ‘필사원’이 있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현지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를 당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데일리NK는 필사원 업무를 담당했던 한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 북한 체제의 속성을 파헤치고자 한다.

다만 본지는 일반적 기사체를 고집하기 보다는 소설적 기법을 사용해서 독자들이 사건의 흐름 및 북한 주민들의 심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