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의 유격대 생활에 전환점이 된 무산지구전투

무산지구전투는 최현의 유격대 생활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그 이전과 비교할 때 무산지구전투를 전후로 유격대 내에서의 최현의 지위가 급부상하여 제 4사장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무산지구전투 당시의 최현의 역할과 그 이후의 무장투쟁에서 비교적 업적이 컸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난 2009년 5월 22일 북한은 양강도 무산지구전투승리 기념탑에서 무산지구전투 승리 70돌 기념 중앙보고회를 진행한 바 있다. 무산지구전투는 북한이 1939년 5월 무산지구에서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인솔하고 일제에게 심대한 정치군사적 타격을 줬다고 주장하는 전투이다. 그런데 필자가 조사한 최현의 회고록을 근거로 할 때 무산지구전투는 1937년 5월과 1939년 5월 두 차례 있었다. 최현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937년 자신의 부대가 무산지구로 진출할 때의 치열한 전투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조선일보의 보도까지 구체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중략) 1937년 봄 우리가 안도현 진창에서 이도선 부대를 전멸시키고 무산 지구를 향하여 남하하자 적들은 더욱 발악적으로 날뛰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대거하여 국경 지대로 진출하는 기세를 알고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압록강, 두만강 국경 연안에 토벌대와 경찰 역량을 급격히 증강하였다. (중략) 5월 15일 해질 무렵이었다. 우리 제 4사 부대는 백두산 동쪽 조선과 동북 국경 계선에 있는 무산군 ‘붉은 바위’ 부근에 이르렀다. 나는 여기서 정찰 경험이 많은 대원들을 선발하여 국경 연선과 ‘붉은 바위’ 일대에 대한 정찰을 진행케 하였으며 또한 국경 지구 주민들을 통하여 상세한 적정을 장악하였다. (중략) 나는 우선 부대의 진공과 철수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일부 성원들로 강한 보초대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다음으로 나는 기관총 3문을 배속시킨 일부 역량으로 적 경비대와 경찰대가 둥지를 틀고 있는 ‘붉은 바위’ 주재소를 포위케 하는 한편 그 서북쪽 고지에도 기관총을 배치하여 삼장, 광평 방면으로부터 달려들 수 있는 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중략) 이윽고 내가 사격하는 신호 총성에 의하여 우리 대원들은 밤 적막을 깨뜨리고 주재소를 향하여 기관총과 보총들로 일제 사격을 하였다. 우리의 화력이 어찌나 세찼던지 단번에 위압 당한 포대의 적들은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지하도로 빠져 도주하였다. 부락은 삽시간에 아군에게 완전히 장악되었다. (중략) 우리 부대의 무산지구 진출과 관련하여 적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신출귀몰한 전략 전술, 높은 조직성과 규율성, 고상한 도덕적 품성과 그 전투적 기개에 혼비백산한 나머지 당시 조선 일보 다음과 같은 비명의 일단을 보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남 ~듣는 바에 의하면 그 지휘자는 최현이라는 조선인 장년으로 금번에 행동을 보게 된 부대 200여 명의 대부분이 조선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공산군의 가장 정예 분자로서 그 중에는 묘령의 여성이 13명이나 끼어 있다 한다. 이들의 훈련은 상상 외에 훌륭한 것으로 특히 산오르기에는 도저히 보통 병대나 민간에서는 모방할 수도 없는 장점을 가졌는 바질서를 단속하고 정조 관념이 강하며 탁월한 점이 허다하고 따라서 그 전략 전술도 또한 교묘한 점이 많아 토벌군의 고통도 무던한 모양이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p.215.


이 같은 최현의 회고를 전제로 할 때 무산지구전투에서도 최현의 부대는 괄목할만한 전과를 올렸다. 지휘관이자 전투원으로서의 최현의 면모는 실제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그 진가를 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최현이 주도했던 무산지구전투가 아닌 또 다른 무산지구전투를 선전하고 있다. 그것은 1939년 5월에 있었던 전투를 가리킨다. 이 역시 최현의 회고록에 언급돼 있다.


“(중략) 이어서 김일성 동지 영솔 하에 각 부대는 장백현 구가점, 15도구, 반절구 등 일련의 전투를 진행한 후 5월 18일 새벽에 압록강을 건너 청봉, 삼지연 등지를 거쳐 무산지구에 도달하셨다. 그리하여 그곳 신사동과 신개척 일대를 완전히 해방하고 지방 일인들 속에서 정치사업을 진행한 다음 대홍단 벌에서 추격하여 오는 일제 국경 경비대와 경찰대 수백 명에게 섬멸적 타격을 줌으로써 적들에게 정치 군사적으로 또 한번 심대한 패배를 주었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p.252.


이렇게 볼 때 무산지구전투는 두 차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먼저 있었던 1937년의 무산지구전투에 관해서는 아무런 해설이 없다. 김일성이 주도하지 않았고 단순 참가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1939년에 발생한 무산지구전투는 김일성이 주도했던 전투이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기념탑까지 만들어 선전하고 있다. 김일성이 모방할 수 없는 최현 특유의 전사로서의 기질과 지휘관으로서의 주도면밀함은 1939년 10월과 그해 겨울에 있었던 한총구 전투와 얼청페 전투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 두 전투에서 최현은 나름대로의 지략과 전술을 선보이며 일본군 토벌대를 격퇴시켰다.


“(중략) 그 때 한총구는 약 3미터 높이의 토성으로 둘러싸였고 여섯 개의 포대가 높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성안에는 왜놈들이 후방 강화를 위하여 파견한 백여 명의 경찰놈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놈들은 이곳에서 명월구와 안도로 통하는 군사인원과 군수 물자 수송의 안전을 보장하며 일군의 소련 침공을 용이케 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적들은 이 곳에 무장 자위단도 배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장 자위단은 얼허호 자위단의 장 단장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총구를 치기 전에 먼저 얼허호 자위단의 장 단장과 연계를 취하여 정보를 입수하였다. 장 단장은 그 곳 자위단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자위단이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어제까지만 해도 경찰 100여 명과 자기들 자위단만이 있었는데 이 날 저녁에 위만군 길림성 군구 교도 연대 사관생 600여 명이 한총구에 도착하여 임시 주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그런데 우리는 적 600여 명이 우리보다 조금 앞서 이 곳에 도착했으나 먼 길을 도보로 행군해 왔기 때문에 극도로 피곤한 형편에 있다는 것과 그리고 600여 명 중 정규 훈련을 받은 놈은 일본놈 ‘지도판’ 외에 불과 몇 명 밖에 안 되며 나머지는 모두 위만군 신병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형편은 무비의 용감성과 대담성 그리고 자기 희생적인 헌신성과 능란한 전술적 수완을 겸비한 동무가 필요했다. 그러면 누가 적중으로 돌입하여 놈들을 일거에 섬멸 혹은 항복시키며 있을 수 있는 적들의 태세에 임기 응변하는 전술을 적용하며 아군의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적들을 순간에 굴복시키자면 적 지휘부를 먼저 습격해야겠는데 목숨을 내대고 들어가는 이 과감한 전투 행동을 누가 해낼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였다. (중략) 불과 몇 십 분 동안에 유경수 동무가 지휘한 우리 습격조원들은 단 한 명의 손실도 없이 7백 여 명의 적을 대부분 살상 포로하였으며 경기관총 7정, 신형 보총 600 여 정, 모젤 권총 수 십 정을 비롯하여 기타 많은 탄알과 군수품, 식량 등을 노획하였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pp.268-271.


위에 길게 인용한 대목은 1939년 10월에 최현이 주도한 한총구 전투였다. 일본군과 위만군을 합쳐 700여 명을 살상 또는 포로로 사로잡고 그 밖에 각종 노획물도 습득한 승리였다고 최현은 기록한다. 그 해 겨울에 있었던 얼청페 전투에서는 한총구 전투에서의 2배가 넘는 일본군 토벌대 1500여 명과 맞닥뜨리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중략) 얼청폐 전투는 그 해 겨울 우리가 적 한 개 집단부락을 습격한 다음날에 있은 전투인데 적들은 1500여 명의 토벌대를 우리가 있는 얼청페 골안으로 들이 미는 한편 3대의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달라 붙은 싸움이었다. 그 때 우리는 놈들이 실컷 폭격을 한 다음 이제는 빨찌산이 다 죽었겠거니 하고 뻣뻣이 서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매복선까지 접근시켜 놓고 기관총, 보총으로 일제 사격하여 무리로 쓸어 눕혔던 것이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pp.271-272.


이렇게 전투를 거듭할수록 최현은 지휘관이자 전투원으로서의 기량을 연마해갔다. 1940년 봄부터 여름 사이 일본군의 토벌이 절정에 달했을 당시에도 최현은 약 100여 명의 빨찌산 동료들을 인솔하고 왕청현 나자구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십리평치기 전투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전투를 수행하면서 일본군 토벌대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