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1966년 평양 중국인 학교 반란(?) 사건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조중우의교. /사진=데일리NK

화교(華僑)는 북한에서 특수적인 사회집단 중에 하나다. 중국 국민이지만, 북한 영주권이 있다는 특징 때문이다. 북한 화교의 흥망사는 복잡하지만, 결국 이들은 ‘장사꾼의 소수민족’이 되었다. 조선노동당에 입당할 수 없었지만 중국에 제한 없이 방문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장사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북한 일반 주민보다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북한에서 완만하게 지위와 역할을 확보한 건 아니었다. 굴곡진 역사 중에 1966년에 발생한 학생 반란 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평양 중국인 중학교는 1955년 4월에 설립된 비교적으로 큰 학교였다. 1963년 북한 당국은 하루아침에 교육 언어를 중국어에서 조선어로 변경하는 조치를 취하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이 학교는 큰 문제 없이 1966년까지 운영할 수 있었다.

문제는 1966년 불거졌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선언한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치기 시작한 것으로, 마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북한 화교 청년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즉, 평양 중국인 중학교 학생들은 ‘마오쩌둥 선집’과 ‘마오 주석 어록’를 탐독하였고, 일부 열성 팬들은 마오쩌둥의 책을 받기 위해 대사관에 직접 찾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다 그해 5월 15일 화교 학생들은 평양 용악산에 등반하였다. 상급생들은 중국의 오성홍기(五星紅旗)를 휘날렸고, 나머진 학생들은 “공산당 만세” “마오 주석 만세”를 외쳤다. 또한 이들은 하산하면서 “지도자를 의지하며 큰 바다로 나아가자”는 마오쩌둥 찬양 노래를 불렀다.

당시 학교 당 비서(위원장) 김영섭(金永燮)은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깃발을 빼앗고 시도했고, 노래를 그만 부르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북한 비서가 중국 사람에게 이러한 명령을 할 권리가 없다고 반박하였다.

이후 6월 초 학생들은 마오쩌둥 어록 대자보까지 준비했고, 마오쩌둥 노작 연구 동아리도 설립하였다. 8월 18일에 학생들은 베이징(北京) 천안문(天安門) 광장에서 진행된 마오쩌둥 연설을 들으러 모이기도 하였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북한 당국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8월 22일 학교 측은 북한 당국과 학생 부모의 회의를 소집하였다. 학교 측을 리엄순(李严顺, 리얜슌) 교장, 당국 측을 평양시 인민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제1부위원장은 외국인들이 자국 지도자의 사상을 배울 권리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학교 측은 마오쩌둥 사상도 가르치고 공산당 창건일이나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창건일도 기념한다고 하였다. 만일 어떤 문제가 있으면 조선화교연합회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의 협력하면서 해결 방법을 찾아볼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타협 시도는 실패하였다. 바로 다음날 8월 학생들이 김영섭 비서의 사무실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북한 당국은 학생의 행동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보았다. 결국 9월 15일 학교에서 일하던 모든 북한 주민들은 소환되었고, 학교 측에 제공했던 각종 지원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학교 측은 살아남기 위해 ‘자력갱생’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 상급생은 학교 식당을 관리했고, 남성 학생은 가축을 기웠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학교 측은 결국 9월 21일에 ‘한 달 방학’을 선언하였다. 그러다 10월 12일 방학은 무기한으로 연장되었고, 학생들이 다른 학교에 편입할 수 있다는 선언도 나왔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1966년 10월 25일에 평양 중국인 중학교는 폐교되었다.

이 학교 사건에 강계(자강도), 신의주(평안북도) 그리고 청진(함경북도)에서도 비슷한 사건들은 벌어졌다. 이 학교들도 역시 폐교되었다.

평양 중국인 중학교 사건 후 북한 화교에게 암흑기가 도래하였다. 북한 당국은 그들이 곡물 배급을 받을 권리는 있지만, 음식이나 생활필수품 공급 대상자는 아니라고 결정하였다.

그러다 1970년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방북 이후 북한 화교는 국적 회복 권리를 받았다. 화교 커뮤니티가 부활되었고, 평양 중국인 중학교도 재설립되었다.

평양 중국인 중학교 사건은 북한 역사상 거의 유일한 학생 반란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마오쩌둥 주의자 학생과 김일성의 북한 싸움에서 어느 측을 지지해야 할지 난감한 부분은 있을 수 있다. 마오쩌둥도 김일성도 일당제, 후보자가 한 명밖에 없는 가짜 선거, 개인 자유를 탄압, 무능한 계획경제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사건은 ‘악대선(惡對善) ’ 아니라 ‘악대악(惡對惡)’ 간의 싸움이었다고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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