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실상 세계에 알리는 탈북 작가가 되기까지

림일(평양·49) 씨는 2005년부터 탈북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9권의 책을 냈으며 2번의 국제작가대회 참가, 잡지, 칼럼 기고 등 집필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작가라는 직업은 배고픈 직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림 씨에게는 계속 펜을 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바로 비정상국가, 김 씨 일가의 체제하에서 기본적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북한주민들때문이다. 북한주민들은 폐쇄적 국가에서 바깥세상 소식을 알기 힘들다. 또 이들은 일생 동안 사상교육을 받으며, 옳고 그름을 표현할 경우 문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 온 림 씨는 현재 ‘김정은께 보내는 림일의 편지’라는 칼럼을 통해 이제라도 북한주민의 민생을 돌봤으면 하는 바람을 김정은에게 전하고 있다.

쿠웨이트 건설현장으로 착출, 한국 망명까지

림 씨는 평양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 1984년 학교를 졸업한 이후 사회안전부 건물 관리소 등 특수기관에서 8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나 80년대 북한 역시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도 TV, 냉장고, 세탁기, 제봉기, 오디오 중 한 가지 사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월급으로는 쌀 1~2kg을 살 수 있는 정도라 꿈도 꿀 수 없었다고.

그러다 80년대 북한에 해외 노동 바람이 불기 시작해 돈을 벌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해외 노동을 지원했다고 한다. 해외에서 3년을 일할 경우 다섯 가지 가전제품을 모두 살 수 있어 청년들에게 인기가 매우 좋았다고 림 씨는 설명했다.

단 차출 조건은 5촌 내 정치범, 경제범이 없어야 하고, 최근 5년간의 직장 경력을 검증받아야 하며 기혼에 자녀도 있어야 한다. 해당 조건에 모두 부합했던 터라 림 씨는 차출될 수 있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득 찬 채 쿠웨이트로 향했다.

하지만 담당자의 달콤한 말과 달리 쿠웨이트 노동 현장은 열악했다. 주변 도시도 둘러보고, 해외 문물을 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착 다음날 바로 주택 건설현장에 투입됐다. 그렇게 휴일도 없이 하루 12~14시간을 일했는데 5달 동안 월급 한 번 받지 못했다.

해외 노동자들의 급여는 북한당국이 가로채 갈 뿐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건 없었다. 타국에서 인민들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북한당국의 배만 불리다니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당 승인으로 합법적으로 여권을 발행 받아 쿠웨이트에 왔기 때문에 림 씨는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한국으로 온 림 씨는 북한의 실상에 분노를 느끼면서도 북한주민들을 위한 활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분노가 집필 활동의 원동력이 됐다.

재능을 찾아 과감하게 도전하다

집필활동으로 북한주민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림 씨. 한국 입국 후 식당일, 화물 운송일 등을 했다. 일에 재미를 붙이면서 화물 운전으로 개인사업도 하게 됐다. 일을 시작한 지 3년 정도 됐을 때 우연히 남한 출신의 목사님을 만나게 됐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목사님은 이후 알코올중독에까지 빠지는 등 어두운 과거를 안고 있었다. 그러다 아내를 통해 신학을 접하게 됐고 이후 대학원까지 졸업하게 됐다면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얘기해 줬다. 그러면서 림 씨에게 재능을 보이던 집필 활동을 하는 것이 사회에 더 의미 있는 일 아니겠냐며 작가가 될 것을 제안했다.

겁도 났지만 목사님을 보고 용기가 생겼다. 또한 북한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참혹한 실상을 세상에 알리고 폭정적, 반평화적 행위를 고발하고 싶었다. 부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신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정상으로 돌아오는데 일조하고자 편지를 쓰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 정착 이후 선거만 5번에 참여해봤다는 림 씨. 생활총화 등 북한주민의 정치의식, 비판의식은 남한사람과 차이가 있다면서 민주주의의 혜택과 소중함을 국민들이 알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바깥 세상일을 잘 모르는 북한주민들에게 인간의 기본적 권리가 있음을 알리고 싶다고 전했다.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