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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총기 도난사건 2부] 희생양이 된 부부의 파란만장한 인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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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혁명가가 반역자로


보위원이 감시를 부탁하던 여자는 원래 평양 여자였다. 오빠는 국가보위부에서 큰일을 하는 사람으로 집안 자체가 성분이 좋았다. 오빠와 동생들이 끌끌한(듬직한) 간부였지만 여자는 가족 안에서 조금은 몰리는 대상이 되어 형제들이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처지에 있다보니 처녀의 몸으로 마누라가 죽은 자리에 아이가 있고 나이도 10년 이상이나 되는 손 씨 남자에게 시집을 왔다. 80년대 북한 현실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나이가 5살 이상인 남자에게 시집을 가도 너무 늙은 남자와 결혼한다고 질색하던 시기였다. 손 씨는 이남 출신이었다. 돌아가는 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남조선 국민으로서 북한의 지령에 따라 남조선에서 대남활동을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보면 북한의 지령으로 움직이는 ‘간첩’이었고 북한에서 보면 남조선 혁명가였다. 하지만 결국 간첩 활동이 탄로 나서 감옥에 잡혀갔고 끝내 죽었다고 한다. 북한 정부는 손 씨의 아버지가 남조선 정부를 와해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북한에서 11과(남조선 혁명가들을 우대하는 부서) 대상으로서 상당한 배려를 받고 당 일군(일꾼)쯤은 해야 할 인물이었다. 하지만 북한 정부는 그를 일찍 알아보지 못했다. 국가는 뒤늦게야 도당에 사람을 파견해서 손 씨를 불러들였고 아버지가 공화국을 위해 일한 훌륭한 혁명가였다는 것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군대에 나갔다가 제대되어 온 아들을 대학에 갈 수 있게 배려해주고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나라에서 간부로 써주겠다고 약속까지 해주었다. 손 씨는 인생이 다 꺼져가는 나이인 60이 넘어서야 인정받게 된 곡절 많은 인생을 돌이키며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 앞에 엎드려서 꺽꺽 목이 메게 울었다고 한다.

손 씨의 어린 시절은 파란만장했다. 아버지가 북한을 위해 간첩행위를 한다는 것을 알아낸 한국 정부가 조직의 주모자들을 잡아들이고 가족까지 씨를 말린다는 바람에 아버지의 친구들이 손 씨를 몰래 빼돌려서 밤중에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야반도주시켰다고 한다. 그때부터 공부할 시기를 놓치고 부모도 없이 가랑잎처럼 일본 땅의 여기저기를 빌어먹으며 떠돌았다고 한다. 손 씨는 글을 쓸 줄 모른다. 밥도 먹여줄 부모가 없는 일본 땅에서 학교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북한 정부가 일본에 있는 조선 동포들을 받아들여 집도 거저 주고 공부도 거저 시켜준다는 바람에 귀국 물결에 휩쓸려 조선으로 오게 됐다.

하지만 북한 사회는 약속과는 달리 그들을 외면했다. 공부할 나이가 이미 지났다며 학교에 보내주는 대신 직장 파견장이 나왔다. 끝내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평생을 글을 모르는 사람이란 딱지를 안고 살았다. 북한에서는 그 나이에 글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글을 쓸 줄 모른다면 사람들이 신기해했다. 아이들이 손 씨만 보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놀려댔다. 손 씨는 북한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사람으로 일생을 속절없이 보냈다. 그런 그에게도 사랑은 찾아왔고 부부는 잘 융합이 되어 남들이 부러울 정도로 사랑하며 아들 셋을 키워가면서 알콩달콩 살았다. 그들 부부는 고난의 행군도 남들보다 더 잘 이겨내 유명한 공업품 장사군(꾼) 부부로 소문이 났고 생활이 힘든 보위원, 보안원들은 그들 부부의 주위를 감돌면서 식사 한 끼, 담배 한 갑이라도 얻어 피울 수 있었다.

처음 가 본 중국이 불행의 씨앗으로 


그들에게 불행이 오게 된 것은 손 씨의 부인이 중국에 있는 6촌 언니를 찾아 중국 친척방문을 떠난 뒤부터다. 장사를 하면서 돈에 대해 남들보다 먼저 눈을 뜬 여자는 중국에서 한탕 뛰면 많은 돈을 벌 것이라는 환영에 사로잡혔다. 당시는 중국에 있는 친척들이 북한에 있는 형제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북한 사람들도 중국의 발전에 대해 칭찬하면서 환상에 사로잡히던 때였다. 대신 남조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여자는 중국에 있는 6촌 언니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국가보위부와 당 기관에서 일하는 여자의 오빠들은 자기들에게 허물이 될까 봐 한사코 말렸다. 그러나 여자는 나이가 있는데도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아서 꺾을 수 없었다. 보위부는 고임돈(뇌물)만 내면 여권을 내주겠다고 여자와 약속했다. 보위부는 여자의 집안 환경이 뜨르르한(소문이 자자하게 퍼진) 것을 보고 선선히 여권을 내주었다.

여권은 그냥 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여권을 내는데 고이는 돈은 100달러 5장이었다. 여자가 아무리 장사를 잘한다 해도 그 정도의 돈은 가지고 있을 수 없었다. 여자는 워낙 수완이 좋아서 돈 잘 꾸기로도 소문이 났다. 장사를 잘하니 사람들이 믿고 이자를 붙여 꿔 주고는 했다. 그때 당시 엔화 10장이면 대단한 돈이었는데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 윗집에 일본에 친척이 있어 돈을 보내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자를 주기로 하고 돈을 꾸어왔다. 당시 괜찮은 집 10채를 살 돈이었다. 그녀는 구역 보안서의 외사국에 100달러 5장을 뇌물로 바치고 중국 여권을 쟁취한 다음 큰돈을 벌 계획을 하고 중국으로 떠나갔다. 그녀의 여권 기간은 3달이었다.

하지만 정작 중국에 도착해서 보니 생각과는 달랐다. 자기가 꿔온 돈의 절반도 갚지 못할 것 같았다. 여자는 비로소 중국으로 온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6촌 언니의 말을 들어보니 희망이 있음을 깨달았다. 중국에 오니 중국인들이 모두 한국, 한국 하면서 한국에 대한 소리로 꽉 채워져 있었다. 여자의 머릿속에서 잡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집에 있을 때 남편이 남조선에 있는 고향 집과 친척들을 떠올리며 잊지 못하던 생각이 났다. 6촌 언니에게 말하니 한국에 친척이 있다면 거기에 전화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그러면 그까짓 돈 얼마든지 갚을 수 있다고 말했다. 빨리 북한에 있는 네 남편에게 전화해서 집 주소와 친척들 이름을 알아보라고 재촉했다.

이후 브로커를 통해 남편에게 연락이 닿았고 주소가 빠르게 날아왔다. 6촌 언니가 한국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손 씨의 친척들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한국에 있는 고모를 찾아냈다. 고모 쪽에서 반응이 대단했다. 조카가 살아있다니 꿈만 같다며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그리고 “네가 정말로 내 조카며느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조카를 데려와라, 조카의 목소리를 듣고 돈을 내보내 주겠다”고 했다. 여자는 남편이 없으면 아무리 사정해도 돈이 그냥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집에 있는 남편을 중국으로 탈북시킬 궁리를 했다. 끝내 여자는 브로커를 통해 남편 손 씨를 탈북시켜, 중국에 있는 자기의 거주지까지 불러들였다. 남편과 고모의 통화가 즉시 이루어졌다. 고모와 조카가 울먹이며 말을 주고받았고 고모는 당장 돈을 내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여자는 그때 자기 남편이 보위부로부터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이제 돈에 대해서 한 시름을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 손 씨는 불법 출입국자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들은 곧 다른 곳으로 자리를 뜨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여자는 돈만 받으면 남편을 빨리 북한으로 내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손 씨가 사라지자 북한 보위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급히 중국에서 활동하는 보위원들에게 연락을 띄웠다. 그들 부부가 자리를 뜨려는 그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공안과 보위부가 동시에 그들 부부를 덮쳤다. 그들은 결국 두 몸이 한 밧줄에 묶인 채 비법월경자 딱지를 달고 북한으로 끌려와 도 보위부에 송환되었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사태가 그렇게 빨리 벌어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보위부 독방에 수감된 부부의 운명


감옥 이미지 / 사진=pixabay

그들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탈북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고모와 통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에게 심부름을 해준 브로커들도 연줄로 걸려 다 보위부에 갇혔다. 보위부는 두 사람을 따로따로 독감방에 처넣고 남조선에 있는 고모와 무슨 말을 주고받았냐고 매일같이 취조했다. 매일 두들기고 종이에 자백서를 받아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모두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위부의 지하 감방 안에서 불지 않는 사람이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한 일들에 대해 고스란히 토해내기 시작했다. 3개월 만에 아내가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손 씨가 풀려났다. 아내는 그런대로 밖에 나다닐 수 있는 몸이었지만 손 씨는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안에서 절반은 폐인이 되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살아서 돌아온 것만도 기적이었다.

보위부는 그들을 내보내면서 “너희들이 살아서 나갈 수 있은 것은 손 씨의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업적을 배신하지 말라. 지켜본다”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곳에서 특혜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보위원 가족들 속에서 소문은 다르게 돌았다. 그들이 나오긴 했지만, 완전히 나온 것이 아니라는 소문이었다. 나라를 위해 업적이 있는 11과 대상이 보호를 받지 못하고 보위부에 갇혀 맞아 죽었다면 주민들 속에서 여론이 확산될까봐 당분간 내보냈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들에 대한 보위부의 감시는 하루도 어김없이 뒤따랐다. 보위부는 특출한 신분을 가진 그들이 다시 탈북할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지금도 북한은 탈북하다가 북송되어 온 탈북자들은 또 뛴다고 보고 품을 들여 감시를 하고 있다. 하물며 특수한 환경에서 살아온 그들이 한국으로 뛰는 날에는 국가의 정치적 손실을 만회하기는 힘들다. 결국, 중국에서 부자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꿈은 하늘로 날아가고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다. 그동안 중국에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남은 돈까지도 다 털리고 빚만 진 채 알거지가 되었다.

그들에게 돈을 빌려준 여인은 애간장이 다 타버릴 지경이었지만 돈을 받을 길이 없었다. 북한은 돈을 받으려고 싸움을 하면 오히려 돈을 빌려준 사람이 더 걸린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의사 부부인데 인격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받을 상황이 못 되니 한숨만 내쉬었다. 결국 그들은 한 푼도 못 받고 말았다. 총 사건은 그들이 보위부에서 나온 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때에 터졌다.

(3부에 계속)

* 편집자주 : 북한 보안서(경찰서) 등지에는 ‘필사원’이 있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현지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를 당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데일리NK는 필사원 업무를 담당했던 한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 북한 체제의 속성을 파헤치고자 한다.

다만 본지는 일반적 기사체를 고집하기 보다는 소설적 기법을 사용해서 독자들이 사건의 흐름 및 북한 주민들의 심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