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포로 송환, 제발 북한 눈치보지 말라”

6.25참전 국군포로들의 자녀들이 모여 국군포로들의 생사확인과 송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한다.

국군포로 가족 30여명은 18일 저녁 잠실역 부근 향군회관에서 <6.25참전 국군포로 가족모임>(가족모임) 발족식을 가지고, 앞으로 활동에 대한 의지를 모았다.

<가족모임> 서영석 대표(30. 99년 탈북)와의 인터뷰를 통해 모임의 취지와 활동계획을 들어봤다.

▲ <6.25참전 국군포로 가족모임>서영석 대표

– <가족모임>을 결성하게 된 계기는?

우리는 국군포로와 그 자녀라는 이름으로 북한에서 갖은 고생을 다했다. 고향인 남한으로 목숨을 걸고 찾아왔지만, 여기에서도 우리는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직도 북한에 생존해계시는 국군포로(확인된 숫자만 542명)들과 그 가족들의 송환을 위해 정부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가족모임>의 구성은 어떻게 돼있나?

현재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국군포로 자녀들을 주축으로 하여 30여명의 가족들이 함께하고 있다. 모임을 정식 결성한 후에는 정부와의 협조를 통해 정확한 데이터를 파악하고, 남한에 남아있었던 가족들과도 같이 활동할 것이다. 넓게는 생존해계시는 국군포로분들도 함께해서, 국군포로 문제에 대해 전반적으로 같이 활동해나가고 싶다.

– 북한에서 국군포로의 처우는 어떠했는가?

국군포로는 지역별로 나뉘어 탄광광산으로 보내졌다. 단체로 보내진 것도 아니고 강제배치를 통해, 산간오지 지방에 따로따로 보내졌다.

이날 참석한 이연순씨는 자신의 아버지는 함북 회령 지방에 있는 탄광에서 근무했는데, 회령에서도 수백리를 더 들어간 산골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도 하나 없는 막막 산골에서 강제노동을 하다 언어장애까지 얻었고,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결국 2000년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 북한은 출신성분에 따라 차별이 심하다고 알고 있다. 서대표가 국군포로의 자녀로써 받은 불이익은 무엇인가?

북한에서 국군포로 자녀들은 결혼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대학도 자기 의사대로 갈 수 없다. 나도 사범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진학할 수 없었다. 또한 내 누이도 북한에서 인민군 장교와 결혼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 국군포로 문제에 대한 남한 정부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국과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에 있어 남한정부가 얼마나 소극적인지 알 수 있다. 미국은 유해송환을 위해서도 북한과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서고 있다. 국군포로는 아무 조건 없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송환되어야 한다. 대부분 7~80세로 연세가 많으셔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분들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남한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 사안만이라도 제발 북한의 눈치를 보지 말고 우리 할 말을 했으면 좋겠다.

–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우선 그분들의 생사여부를 확인하는 사업을 진행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계를 가졌지만, 정부의 협조와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데이터를 확보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국민들에게 국군포로 현황을 알리는 캠페인을 진행할 것이다. 국군포로 송환문제도 전 국민적인 관심과 의지가 있어야만이 더 빨리, 더 효과적으로 진행될 것 이다.

이와 연계해 국군포로 백서도 발간할 생각이다. 실제 이분들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분들이다. 이 분들에 대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위해서라도, 국군포로에 대한 진실을 남한 사람들에게 알려내고 싶다.

이외에 북한인권 NGO단체들과의 연대를 통해 국군포로 송환을 정부에게 강력히 요구해 나갈 것이다. 또 그분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문제도 해결해 나갈 것이다.

양정아 기자 junga@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