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먹이 훔치려 개의 눈치를 살폈다”

▲ 지난해 열린 제60차 유엔인권위원회 (출처:연합)

북한 15호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 김영순(69.여), 김태진(49.남) 씨가 ‘제61차 UN인권위원회’ 증언을 위해 29일 오후 제네바로 출국했다.

이들 2명은 30, 31일 이틀간 UN인권위에 참석,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인권실태를 증언하게 된다. 그동안 북한 인권실태에 대한 증언이 있었지만 유엔기구에서 공개적인 증언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UN인권위는 또 <데일리엔케이>가 국내 최초로 보도한 북한 공개처형 동영상을 31일 회의장에서 공개상영하고, 정치범 수용소 수감 후 생사를 알 수 없는 6백여 명의 명단도 공개할 예정이다.

한편 이들은 유엔인권위 증언 후, 4월 1일부터 런던에서 영국 외무부 관계자와 정치인들을 면담하고 EU본부를 방문, EU의원들과 만날 예정이다.

<데일리엔케이>는 30일로 예정된 김영순, 김태진 씨의 유엔인권위 증언내용을 사전에 입수, 공개한다.

양정아 기자 junga@dailynk.com

아래는 증언내용 전문

◇ 김 태 진

내 이름은 김태진. 56년생으로 북한에서 생활하던 중 1986년 중국으로 탈북 하여 그곳에서 16개월 생활하다가 체포되어 1987년 중국 삼합-북한 회령 다리를 통해 북송되었다.

▲ 김태진 씨(북한민주화운동본부 정치범수용소해체 특별위원회 위원장)

그때 나는 평등하지 않은 북한체제와 수많은 범죄와 사고가 하나도 공개되지 않고, 또 인민이 주인이라고 선전을 하지만 조그마한 자유도 없는 그 땅에서 살기 싫어 탈북 하였다.

나는 중국 용정시 로두구진 기독교회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그때가 1987년 4월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하여서만 들었을 뿐 예수님과 기독론을 비롯한 지식이 모자랐다. 뿐만 아니라 성경도 읽어 보지 못하였다. 그때 나는 탄광에서 일하였는데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성경을 조금씩 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보아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나는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 그때 그들이 나의 짐을 꾸려서 내가 북송될 때 함께 보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심문 받을 때 성경에 대하여 물어 보기에 처음에는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자 심문관은 네가 혹 몰랐을 수 있겠지만 나의 상급이 이 대답을 이해 할 수 없다며, 바른대로 대라고 하였다.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어 성경을 구하여 읽으려고 하였다고 고백하였으며 그들은 나에게 어디서 하나님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느냐고 심히 추궁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당정책 훼방죄, 불법월경에 의한 ‘국가 반역죄’, 반 혁명분자라는 죄명을 씌워 요덕 수용소에 보냈다.

북송 된 나는 8개월 동안 심한 고문과 조사를 받고 1988년에 북한 함남 요덕에 위치한 15호 정치범 수용소에 재판도 없이 강제 수감되었다.

■ 조사 과정

– 움직이면 철창에 수갑을 채워 매달고 권총소제대(권총을 손질하는 솔)로 뼈 부위를 때려 고통을 준다. 추운 날씨에 잠을 안 재우고 나체 상태로 방치해둔다.

– 용변을 볼 때 방안의 온도가 너무 차서 변기통 주변이 얼어붙어 그 위에서 일을 보기에 고통스럽다. 위생관리가 안 되어, 앉아 있으면 얼굴로 이가 기어 다닌다. 감방에서 나갈 때까지 세수를 한번도 할 수가 없다.

– 말을 하면 마주 세워 놓고 뺨 때리기를 시킨다. 조사 과정 너무 고통스러워 쇠못을 먹고 병원에 가서 배를 째려고 하였는데 못이 변으로 나와 실패했다. (수술의 아픔보다 감방 안의 고통이 더 크기에 그것을 잠시라도 모면하려고 선택하였다.)

■ 수용소에서

– 1988년 3월말에 북한 함경북도 요덕군에 있는 15호 정치범 수용소에 재판도 없이 수감되었다.

– 나는 심한 영양실조로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수용소측은 강제노동을 시켰다. 4월 우리는 산에서 부식토를 지게에 져 나르는 작업을 하였는데, 나는 힘이 없어 다른 사람보다 부식토를 적게 담았었다. 그것을 본 수용소 하수인(간수)이 발로 차서 나는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그를 욕하였다고 분주소(보위원들이 있는 곳)에 불려가서 내부지도원에게 참나무 장작으로 심하게 맞아 실신한 것을 수감자들이 방으로 들어갔다.

– 89년 8월이지만 한 밤은 추위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지게에 무거운 것을 지고 머리를 숙이고 가다가 경비병이 지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경비병은 저녁에 나를 불러내어 자기 동료 7-8명을 찾아 함께 나를 타격대상으로 삼고 마구 구타하였다. 그 후 그들은 나를 벌거벗기고 마당 한가운데 수갑을 채워 세워놓았다. 그때 나는 맞는 것보다 이것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다시 느끼었다. 그때도 나는 하수인이 일하러 가자고 발로 깨우는 바람에 깨어났다.

– 수갑을 채울 때 발로 밟아 수갑을 조여 손이 금방 새까맣게 죽었다. 그리고 생석회(구운 석회석) 위에 앉혀 놓았는데 비가 내려 생석회가 피여(석회 덩어리가 물과 화합을 하면 석회가 끓으면서 가스가 방출되면서 온도가 100도 씨 이상 올라간다) 살이 익는데 경비병들은 그대로 앉혀 놓았다. 그때 엉덩이에 화상을 입어 1달 정도 바로 눕지도 못하고, 변을 볼 때도 살이 당겨 대단히 고통스러웠다. 한동안 바지를 못 입었다. 상처에서 진물이 나와 상처에 붙으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경비병들의 방탄벽 공사에 동원 중이었다.

– 나는 90년 가을 옥수수 밭 경비를 서다가 불을 피우고 옥수수를 구워 먹다 보위원 양수철에게 들키었다. 그는 불붙는 장작으로 나의 다리를 마구 때리었는데 그때의 화상자리는 아직도 나를 공포에 떨게 한다.

– 수용소에서는 자신이 인간임을 잊어야 된다. 그래서 나는 개 먹이를 훔쳐 먹으려고 개의 눈치를 살피기도 하고 뱀과 개구리, 쥐 등 먹고 영양을 보충 할 수만 있으면 가리지 않고 먹었다. 왜냐면 꼭 살아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 수용소 안에서는 일이 너무 고되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사람, 미친 척 위장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다고 삽날에 맞아 파상풍으로 골수가 썩어 팔을 잘린 사람, 말도 안 되는 할아버지의 죄로 가족이 들어와 2-30년씩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 수용소 감방에서

– 나는 그곳 수용소에서 감방에도 갔었다. 감방 용도는 수용소에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보통 한달 동안 가두고, 그로 인하여 수용소 생활이 1년 연장되었다. 수용소는 평화롭게 표현한다면 하나의 마을이다. 나는 그곳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임신을 했다. 그녀는 강제로 애를 떨구고(낙태), 나는 감옥에 가게 되었다.

– 수용소 감방에서 너무 추워 다리를 세워 가슴에 안고 옹송그리고 앉으면 조금 견디기가 쉽다. 그래서 그렇게 앉아 있는데, 간수가 보고 그렇게 앉았다고 옷을 벗기고 구두발로 마구 차서 얼굴에 코피가 터져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어지러웠다. 그 후 간수가 한방에 나를 집어 넣었는데 그 방에 벼룩이 너무 많아 고통스러웠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래서 제발 벼룩이 없는 방으로 옮겨 달라고 애원하니 간수가 물통에 물을 담아와서 나에게 끼얹었다. 온몸이 얼어 드는 고통은 다른 고통을 훨씬 능가하였다.

– 지금도 나는 찬바람이 잠깐 나를 스치면 재채기를 하며 콧물이 나온다. 그러면 그때가 떠올라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다.
92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지옥에서 살아나온 나는 97년 혜산을 거쳐 다시 탈북 하였다. 중국에서 항시적으로 따르는 신변의 위협이 있었지만 나는 참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경을 마음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나는 2001년 6월 몽골을 거쳐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한국에 입국하여 지금은 총신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다.

◇ 김 영 순

나는 중국 심양(審陽)시 서탑에서 1937년 5월 26일에 태어나 북경을 거쳐 부모님들과 함께 북한으로 귀국했다. 부모님과 오빠 모두 남한 출신이었지만 오빠가 공산군인 탓에 북으로 가게 되었다.

▲ 김영순 씨(북한민주화운동본부 운영위원)

나는 북한의 예술인재 양성을 위한 평양 종합예술학교의 무용학부 졸업 후 조선인민군 협주단으로 배치되어 1955년 8월 말에 입대하였다. 1968년 제대 후 방직 일용성에 속한 외국인 상점에 취직하였다.

외국인 여행자 상점에서 근무하던 중 1970년 10월에 정치범 제15호 수용소에 가게 되었다. 보위부 초대소에서 2개월 취조를 받고 제 15호 관리소의 제 3작업반에서 5년 동안 일하였다. 1975년에 다시 용평리 제 7반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 농사를 지었다.

용평리는 완전통제구역으로 지주, 치안대, 부농, 중농, 월남자, 목사, 선교사들이고 장본인과 1세대들은 다 처단되고, 그의 처와 2세대들만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는 결혼도 할 수 없고 배급도 없이 자급자족해서 살아야 한다. 용평리는 주로 수용소 내 다른 지역에서 멸시받고 도외시 받던 대상을 한곳으로 모와 놓은 곳이었다.

장본인은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 원인을 제공한 자들을 말한다. 즉 연좌제에 의해 정치범의 가족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60% 이상이다. 장본인이 수용소 내에서 죽게 되면 당일로 즉시 장례식 없이 시체를 처리한다. 관도 없이 거적에 싸서 처리한다.

나는 재판도 판결도 없이 무턱대고 짐을 싸서 무작정 수용소로 끌려갔다. 배급 받는 음식으로는 통 강냉이 조금과 들쥐들뿐이다. 어미 쥐의 배에 든 털 없는 새끼 쥐가 어린 아이들 식독에는 가장 좋은 약으로 알려져 있어 쥐도 귀한 형편이다.

나의 남편 이동명은 1936년 3월 6일생으로 조선백과사전 출판사에 근무하였다. 남편은 1970년 7월 4일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되어 현재까지 죄명은 물론 생사여부도 전혀 모른다. 부모님은 수용소에 들어온 지 6개월 만에 아버지가 영양실조로 돌아가시고 2년 만에 어머니가 영양실조와 부종으로 돌아가셨다.

11살짜리 아들은 수용소 내의 학교에서 돌아오다 다리가 없는 강물을 건너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었다. 1988년에 당시 23살 먹은 아들은 중국국경에서 탈북하려다 5년형을 살고, 다시 탈출을 시도하다 총살당했다.

나는 뽕나무에서 떨어져 쇄골이 골절 되었으나 출근길에 치료도 못하고 그냥 나가 일할 수 밖에 없었다. 매일 10리~15리 길을 뛰어서 출근해야 했기 때문에 과로로 간이 5cm 정도 부었으나 진단도 약도 못 받고 그냥 살아야 했다. 수용소에 들어가자 정신적, 육체적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서 3년간 생리가 중단될 정도였다. 이런 현상은 수용소 내 북한 여성들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과거에는 총과 칼 앞에서 노동을 해야 했으나 현재는 사나운 감독원의 통제 하에서 노동해야 하며 개개인의 모든 행동과 사항은 바로바로 상부에 통보된다. 그래서 잘못한 일이 있을 경우는 15호 수용소 내에 있는 보위부 청사 내의 구치소로 끌려간다. 구치소로 들어가 살아서 나온 자는 없다.

구치소로 끌려가는 방법도 현장에서 체포하거나, 사상투쟁회의 장소에서 끌고 가거나, 갑자기 집으로 찾아오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귀신 몰래 구금하고 행방불명으로 처리한다. 내가 있을 당시에는 수용소 내 수감자들의 30% 정도는 구치소로 들어가 사라졌다. 그 나머지는 병으로 죽게 되는데 공통적으로 비타민 D 결핍으로 인한 “페라그라 병”같은 영양실조로 죽는다.

농사일을 맡은 분조(8~9명으로 구성, 3~4가족이 포함)의 경우는 모판관리를 시키는데 모에 조금이라도 이상 현상이 생기면 반동적 간첩행위로 치부해서 구치소로 끌려간다. 이것 때문에 처리되는 사람도 엄청 많다. 수용소 수감자들 내부적으로도 보위원 감독원 앞잡이가 있기 때문에 최대로 각성(긴장)해서 생활하지 않으면 걸리기가 일쑤이다. 사소한 불평 만 해도 반혁명분자 딱지가 붙는다.

매일총화(평가를 위한 모임), 주총화, 월총화, 분기총화, 상반기, 하반기 총화, 연말 총화 등을 항상한다. 하루종일 정해진 노동시간도 없이 일하다가 이런 총화를 위해 모이면 다 졸게 된다. 그러면 서로 때리게 하고 밖에서 뛰게 한다. 내가 있는 동안 2명이 탈출을 시도했고 이들은 공개총살 당했다.

만약에 배나온 사람이 수용소에 들어온다면 15일이면 배가 쏙 들어가고 얼굴색은 흑색으로 변하고 몸을 가누지 못한다. 일을 못하면 집단, 분조책임으로 해서 서로 때리고 물고 뜯게 만든다.

15호 수용소에는 정신병자 수용소가 따로 있다. 수용소 입구 우측에 따로 있는데, 전국적으로 정신병자들 중에서 김부자에 대해서 말한 정신병자들은 다 17호 정신병자 수용소로 끌고 와서 결국은 다 죽인다. 이들은 거의 매일 죽어서 나간다.

수용소에 학교가 있으나 정식 교육을 하는 학교는 결코 아니다. 선생은 보위원들의 자식들이 하고 있으며 학생들은 단지 토끼 사육공에 불과하다. 그래서 학생들이 토끼풀 과제 하루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하면 벌을 세우고 집에도 안 보낸다.

수용소에 입소한 사람들의 죄명을 보면, 김일성의 목에 혹이 있다고 해서, 김일성 김정일의 석고상을 깨어서, 김일성 초상을 훼손시켜서,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있는 신문으로 장판을 발라서, 김정일의 후처 성혜림과 그의 아들 김정남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남한방송을 청취한 죄로, 상점에 물건이 없다고 말해서 등의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