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부유층, 조상묘 찾아 555원 파묻어”

한국에서 추석은 설날과 함께 ‘우리민족 최대의 명절’로 불리지만 북한에서는 아니다.

북한의 최고 명절은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과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이며, 추석은 단순히 ‘조상 묘를 손질하는 날’ 정도의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

특히 올해는 추석 전날이 토요일이어서 북한의 모든 주민들이 ‘생활총화’, ‘강연회’, ‘집중학습’을 받아야 하니, 추석을 ‘명절’로 여기며 편하게 보내기 힘들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설날’이나 ‘한가위’같은 명절이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라며 철저히 외면해왔다.

북한이 민속 명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는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다. 당시 북한 당국은 축전에 참가한 외국인들에게 우리 민속놀이를 역사와 우수성을 선전할 필요를 느꼈는데, 이에 따라 민속 명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불가피했다.

대다수 북한주민들은 이때부터 추석이 중국의 명절에서 유래된 제삿날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소중한 명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추석은 ‘민족 명절’이라는 의미보다 조상들의 묘를 손보는 ‘공휴일’ 정도로 보는 인식이 강하다.

북한에서 추석이 이렇게 단순한 의미밖에 갖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열악한 교통사정과 주민들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다.

북한 당국도 추석 때 주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추석 전날 오후부터 조상의 묘가 멀리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시간을 준다. 또 추석 당일에는 열차나 버스의 운영 횟수를 늘려 주민들의 편의를 보장해 주는 ‘대책’도 뒤따른다.

하지만 워낙 교통사정이 열악하고 주민들의 이동 절차가가 까다롭기 때문에 추석날 멀리 있는 부모를 찾아가거나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등의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성묘를 위해 확대 운행되는 열차라고 해봐야 겨우 한 두 대 밖에 없고, 다른 도(道)나 군(郡)으로 이동하려면 원칙적으로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아야 하기 때문에 주민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조상의 묘를 찾는 주민들 대부분은 백리 안팎의 길을 걸어서 다녀와야 한다. 다른 지역에 있는 조상의 묘를 찾아가려면 큰맘 먹고 열흘 전부터 여행증명서와 열차표를 신청하고 복잡한 기차 칸에서 2~3일씩 서서 갈 각오를 해야 한다.

북한 주민들이 추석을 여유 있게 보내기 어려운 이유는 ‘가을’이라는 계절과도 관련이 있다. 북한에서 가을은 ‘고양이 손발도 빌려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쁜 시기다. 농장물 수확과 운반을 위해 농장원뿐 아니라 공장노동자, 가두여성(주부), 학생들까지 모두 동원된다. 긴 겨울을 보내려면 각 가정도 겨울나기 준비를 해야 한다. 때문에 조상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최근 들어 당간부들이나 큰 장사꾼과 같은 이른바 부유층 사람들은 추석에 조상을 묘를 찾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유별나다. 조상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과 권력, 출세를 바라는 ‘미신행위’를 펼치기 위해서다.

북한에서는 2000년대 이후 평양 같은 도시 주민들조차 점쟁이들을 몰래 찾아다니며 거액의 돈을 들여 자신의 ‘장사 운’, ‘출세 운’을 알아보는 미신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일반 주민들은 물론이고 당(黨)간부나 군관, 교원과 같은 북한의 인텔리 층에서 그 확산이 더 빨랐다.

북한의 점쟁이들이게는 특이한 공통점이 있는데, 나쁜 운세는 모두 ‘조상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따라서 운세를 역전시킬 방법으로 하나같이 ‘조상들의 묘 자리’를 들먹인다. 특히 조상 묘에 제사 지내는 방식에 ‘정성을 더 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사람들은 시간을 내 조상 묘를 찾는다.

이들은 조상 묘를 찾아 점쟁이들이 알려준대로 묘지 주변에 돈을 파묻거나(이때 ‘돈이 오(5)십시요’라는 의미로 55원이나 555원을 묻는다), 붉은 천을 태워 특정방향으로 재를 날리는 행위를 펼친다. 이들에게 추석은 조상 묘 앞에서 구복(求福) 행위를 하는 날이다.

추석 때 한국 사람들은 가족끼리 주고받는 선물과 음식 장만에 돈을 쓴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점(占)을 치고, 조상 묘 앞에서 펼칠 미신행위를 위해 돈을 쓴다. 이렇게 쓸 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행복한 편이다. 북한에서 ‘추석’은 명목상 국가 배급조차 없다. 그래서 돈 없고 가난한 일반 주민들은 평소와 똑같다. 평소와 똑같이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명절’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