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월드컵 8강 영웅들도 수용소 갔다”

▲ 정치범수용소 경비대원 출신 안명철씨가 그린 수용소 위치

전세계에서 정치범이 가장 많은 나라가 바로 북한이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인정하는 정치범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의 사회를 ‘지상낙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낙원’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그들은 “정치범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관리소’라 부르는 정치범수용소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지만, 항상 15만 명 정도가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왜 그들은 ‘낙원’을 반대했던 것일까? 부러울 것 하나도 없을 ‘낙원’에서 무엇이 부족해 그들은 ‘죄’를 지었단 말인가? 그들은 과연 정치범들인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의 사연은 각기 다르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다.

출신성분 불량자(적대계층)와 그 가족

적대계층은 8•15이후 전락노동자, 부농, 지주, 친일•친미주의자, 반동관료배, 천도교 청우당원, 입북자, 기독교신자, 출당자, 철직자, 적기관 복무자, 체포•투옥자 가족, 간첩관계자, 반당•반혁명 종파분자, 처단자 가족, 출소자, 정치범, 민주당원, 자본가 등 21개 부류의 사람들을 말한다.

북한에서는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주민재등록 사업과 3계층 51개부류 구분사업을 실시해 6,000명을 처형했고 15,000세대 70,000여 명의 사람들이 대거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시기에 정치범수용소가 대규모로 증설되었다. 그리고 1980년 노동당 6차대회 이후 주민증검열사업으로 그때 운이 좋았던 사람들이 상당수 검거되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 외에도 상시적으로 공민증 재등록, 대조사업을 벌여서 철저하게 출신성분을 가려내고 있다.

▲ 북한의 3계층 51부류

▲ 적대계층을 세분화한 재분류

이들이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이유는 단지 하나이다. 출신성분이 나쁘다는 것.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당사자들은 거의 죽었는데도 그 자손들이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죄도 없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들을 과연 정치범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혁명분자와 그 가족

북한은 1958년 12월부터 정치범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투옥 • 처형하거나 산간오지로 추방하였다. 특히 1973년부터 김정일의 세습체제 구축을 위한 3대혁명소조활동과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함과 때를 같이하여 비판자와 정적들을 숙청, 그 가족들과 함께 수용소에 수감하였다.

사실 해방전후와 한국전쟁 전후를 제외하곤 북한에서의 반혁명분자란 사회주의 체제를 반대하거나 정치노선에 반대한 사람들이 아니라 김일성 • 김정일의 권력장악과 유일사상체계에 반대하거나 협조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인민의 낙원’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수령의 낙원’에 반대한 사람들이다.

이들과 그 가족들 역시 수용소에서도 ‘완전통제구역’에 수감되어 일생을 그곳에서 마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북한의 고위 인사인 김창봉, 김봉학, 김도만, 박금철(전 부수상 및 정치국원), 허봉학(전 대남공작기관 책임자), 김광협(전 당서기국 서기) 등도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들이 과연 북한 형법에서 규정하는 ‘반국가범죄’를 지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럼 일반 주민들은 무엇 때문에 정치범수용소로 가는 것일까?

북한에서 형법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이다. 북한의 일반 주민들은 형법과 같은 법에 대해서 잘 모른다.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죄가 되고 무엇이 죄가 안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중국에 호기심으로 구경을 갔다 와서는 그것이 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르고 단지 꺼림직하다는 생각에 자수를 하였다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안혁(요덕 15호수용소 출신)씨의 경우와 같이 무엇이 죄가 되고 안 되는지 구태여 알 필요도 없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 하기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야 한다” 로 시작되는 이 ‘10대 원칙’은 북한에서 사는 사람이면 그 누구도 몰라서는 안되며 있는 그대로 지켜야 하는, 가장 무서운 법이다.

북한에서 ‘10대 원칙’은 헌법이나 형법, 그 어떤 법보다도 우선하며, 형법상의 반국가범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유일사상체계에 어긋난다”고 낙인 찍히면 가장 큰 범죄자가 되고 만다. 이러한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주민들이 억울하게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김일성 • 김정일을 욕하거나 비판을 하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김일성 • 김정일의 초상화나 뺏지를 훼손한 사람, 신문에 나온 김일성 • 김정일의 사진을 훼손한 사람, 수령의 동상 앞에서 떠들거나 불손한 자세를 취했다는 죄로 끌려간 사람 등등 말도 안 되는 이유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들을 정치범이라 할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아무리 권력이 막강한 보위부나 당 간부라 할지라도 일반 범죄와 관련해선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지만 일단 ‘유일사상체계 10대 원칙’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예외 없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게 된다.

북송 재일동포와 그 가족

전 재산을 김일성에게 헌납하고 조국에 봉사하고자 북송선(北送船)을 탔던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특히 투철한 사명감을 안고 가족들까지 전부 북한으로 데리고 온 1세대들은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와 원한은 물론이고 자기 때문에 자식과 손자, 손녀들까지 정치범수용소에서 고통 받고 있다는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눈을 감고 있다.

별다른 죄가 없음에도 북송 재일동포들을 정치범수용소에 가두는 첫째 이유는 민주주의사회에서 살다 온 이들이 잠재적으로 유일사상체제에 대한 불만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이들이 이질적인 북한 사회에 적응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식량난으로 인해 통제가 약화되어 북한사회에도 외부정보가 어느 정도 유통이 되고 있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 정권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선진국가”라고 주민들에게 선전해왔고, 이러한 허위를 잘 알고 있는 재일동포들이야말로 이러한 선전체계에 위협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대외 승용차 택시사업소 봉사지도원이었던 김보국이라는 사람은 재일동포를 창광산 호텔까지 데려다 주면서 “일본이 발전했다”는 말을 한 마디 했다는 이유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하물며 오랫동안 일본에서 살다 온 북송교포들에 대한 의심은 오죽하였을까?

요덕수용소에는 1974년 초반 1백여 세대 6백여 명의 북송 재일교포들이 처음으로 수감된 이래 1979년까지 1백∼2백 세대씩 집단으로 끌려왔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요덕수용소의 북송 재일교포는 일가족 수용자 8백여 세대 5천여 명과 범죄자로 낙인 찍힌 장본인 3백여 명 등, 도합 5천 3백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고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들은 증언한다.

이들 중 일본인 처들은 수용소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대부분 몇 년을 넘기기 못했는데, 1977년∼1979년 2년 동안 14명의 일본인 처가 수용되었지만 대부분 2∼3년 안에 죽고 2명만이 출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일본과의 수교 움직임에 따라 이들에 대해 따로 관리하고 처우도 조금 개선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강철환씨의 경우처럼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친척들의 송금액에 따라 석방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북송 재일교포들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다.

북한식 ‘자유주의자’와 그 가족

북한 정권은 폐쇄적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외국인과의 접촉을 금하고 이른바 ‘자유주의’ 바람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은 통제한다고 해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국에 나가 일하는 사람들이나 유학생들, 북한 내에서 외국인을 접대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교육과 심사를 거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호기심 반, 실수 반의 행동을 했다가 수용소에 끌려가고 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꺾으며 아시아 국가로서는 최초로 8강에 올라 Korea 붐을 일으켰던 북한 축구의 영웅 박승진도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실수를 했다가 정치범수용소에서 일생을 썩게 된 경우이다. 이때 북한 축구대표팀 선수들은 포르투갈과의 결전을 앞두고 몰래 숙소를 빠져 나와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것이다. 패인(敗因)을 따지는 검열에서 사실이 들통난 선수들은 여지없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박승진의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아 요덕수용소의 혁명화구역에 갔던 것이고, 다른 선수들은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 월드컵 8강신화의 주인공들. 이들은 거의 수용소로 끌려갔다.

“박승진, 안세욱 등이 수용소에 끌려간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일부 선수들의 행방은 지금도 묘연한 상태에 있습니다. 박승진이 요덕수용소에 끌려온 것은 북한 축구계는 물론 저를 비롯한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던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폐인이 되는 수용소의 특별감방에서 영양실조로 죽기 전에 쥐며느리, 설설이, 왕지네, 바퀴벌레등을 잡아먹고 버틴 그의 이야기는 제가 있었던 요덕수용소에서는 전설이 아닙니다.

제가 그를 처음 본 것은 1985년경 요덕수용소 구읍지구 3작업반 다리건설장에서였습니다. 그때 그를 알아본 많은 소년들이 그에게 몰려가 축구이야기를 들려달라며 조르던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는 가급적이면 축구이야기를 피했고 말을 잘 하지 않으려 했었습니다. 그는 다행히도 그곳에서 풀려나 지금은 평양에 거주하고 있습니다.”(강철환 씨의 증언)

외교관의 경우에도 이유 없이 외국인들과 접촉한 것이 발각될 경우 간첩혐의를 받아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가족들과 함께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다. 특히 1989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진 이후 유학생들의 탈출이 잇따르자 외국에 나가 있는 외교관과 유학생에 대한 대대적인 소환과 검열을 실시해 상당수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역시 아무리 권력 있는 집안 사람이라 할지라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외국에 나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국내에서 외국인을 접대하는 북한 주민들의 경우,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이유 없이 말을 걸거나 외국인의 숙소에 찾아가면 역시 정치범수용소행이다. 고려호텔 안내원 김명준은 4.15 축제 때 외국인의 방에 찾아간 것이 죄가 되어 요덕수용소로 끌려갔다.

이 외에도 북한에서의 ‘자유주의’는 남조선 노래를 부르거나 듣거나, 디스코 춤을 추거나, 허가없이 여행을 하는(지금은 사실상 무너진 상태) 등 웃을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주로 경제범들을 수감하는 수용소로 알려진 개천 14호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탈북자 지해남씨는 북한의 혁명영화 ‘민족과 운명’에 나오는 남한 노래 ‘홍도야 울지마라’를 친구들의 술을 마시던 중 적적한 마음에 불렀다가 다른 죄와 결부되어 끌려간 경우다.

최근에는 식량난 이후 중국으로의 탈출이 급증하면서 탈북자 처리문제에 있어서 기준이 외국인이나 한국인과의 접촉여부라고 한다. 이들 중 가혹한 고문에 못 이기거나 ‘사실대로 말하면 그냥 돌려보낸다’는 거짓에 현혹되어 그런 사실을 시인한 사람들은 여지없이 총살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고 만다.

납북자 및 의거입북자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오지 못한 남한주민들은 현재 48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나포된 경우이고 중국이나 독일 등 외국에서 납치된 경우도 있다. 주로 북한체제 선전과 남파공작원 교육에 써먹다가 역시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정치범수용소로 보내버린다.

남북대화에서 납북자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된 지금 북한에서 쉽사리 납북자를 돌려보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이들에게 몹쓸 짓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당국의 거짓 선전에 속거나 남한에서의 잘못 때문에 의거입북한 남한출신 사람들도 상당수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있다. 이들 역시 북송 재일교포들처럼 믿을 수 없거나 북한사회에 적응을 잘 못하기 때문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고 효용가치가 없어져서 끌려가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의거입북 기자회견 직후 끌려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남한 망명자, 귀순자의 가족

식량난 이전에는 간헐적으로 북한의 외교관이나 유학생, 휴전선 인근의 인민군 등 소수의 사람이 남한에 귀순을 해왔지만 식량난 이후 러시아와 중국을 통해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남한으로 들어왔다. 2004년 6월 현재 이들의 숫자는 6천 2백여 명에 달한다.

▲ 남한에 입국하는 탈북자들. 사진은 특정사실과 관계없음.

이들 가운데 불가피한 경우나 가족들이 이미 사망한 경우, 혹은 북한 민주화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곤 대다수의 남한 입국 탈북자들이 자신의 귀순사실을 숨긴다. 자신이 남한으로 온 것이 알려지면 북한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기 때문이다.

특히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해 평소에 한 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안면조차 없는 먼 친척들을 포함해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산간 오지나 탄광,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총살당했다.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탈북자 주성일씨의 수기 ‘DMZ의 봄’에는 황장엽 비서와 촌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먼 친척인 황경빈 사관장이 단지 성이 ‘황’씨라는 이유만으로 끌려가다 반항, 사살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남파공작원 중 남한에 귀순한 사람들의 가족도 여지없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 안혁씨의 증언에 의하면 KAL기 폭파사건의 김현희씨 가족 또한 용평완전통제구역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진짜(?) 정치범

북한에서 반체제, 반김정일운동은 자신과 가족, 일가 친척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다. 때문에 남한이나 여타의 민주주의 국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데모는 물론이고 조금의 비판이나 토론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사람답게 살기 위한 자유를 향한 투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몇 차례의 사건들이 풍문으로만 전해질 뿐 확인된 사실은 거의 없지만, 그러한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준비단계는 있다고 한다.

재일동포로는 최초로 북한에 자비 유학한 이영화 일본 간사이대 교수(북한인권단체 RENK대표)의 증언에도 그러한 사실은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역량과 주변 여건이 성숙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조차 북한의 잘 짜여진 독재체제에 사전에 발각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은 총살되고 그 가족들은 수용소로 끌려가고 만다.

일반 범죄와 억울한 반혁명범죄는 본때를 보여준다며 공개총살을 실시하지만 진짜 반국가범죄와 관련된 사건에서는 공개총살을 실시하지 않고 비밀리에 총살하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확인이 어렵다. 다만 어느 정도의 정보유통이 가능해진 요즘 입에서 입으로 소문만이 무성할 따름이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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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