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이 6개월 만에 한국 고위층 인사에 대한 막말을 재개했다. 지난 5일(현지시간)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가 주최한 중동 지역 국제안보포럼 ‘마나마 대화’에서 강경화 외무장관이 했던 발언에 날 선 반응을 보인 것이다. 연말을 앞두고 김여정이 다시 ‘독설 본색’을 드러낸 것은 미국을 의식한 액션이라는 점과 내년 1월로 예정된 두 개의 큰 정치행사를 앞둔 정지(整地)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강 장관의 회의 발언 중 김여정의 심기를 건드렸던 부분은 “북한은 코로나 확진자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믿기 어렵다”는 대목이다. 이어서 강 장관은 “모든 신호는 북한 정권이 코로나 통제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현재까지 코로나 확진자가 한 명도 없다고 공식 주장하는 북한 당국에게 강 장관의 발언은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도발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중동을 포함해서 미주, 유럽의 다수 국가가 참가하는 국제회의에서 강 장관이 북한을 망신 줬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한편, 지난 8일부터 나흘 일정으로 미 국무부의 스티븐 비건 부장관 겸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한 달여 후면 정권을 이양할 정부의 관리가 방한하고 있을 시기에 김여정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저물어가는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시위라기보다는 신임 행정부에 대한 어필로 볼 수 있다.
사실상의 고별 방한에서 비건 대표가 행할 발언은 북한의 대응에는 의미 있는 변수가 되지 못한다. 북한 당국의 셈법에는 김여정이 나서서 한국을 때리면 새로 들어설 미국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앞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에 보내려는 북한 당국의 메시지는 예컨대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와 같은 대북 기조를 재가동하면서 북한을 외면하지 말라는 것일 수도 있다. 미국을 상대로 도발할 순 없으니, 때마침 그들의 자존감을 건드린 한국 외무장관을 상대로 언어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실제로 김정은은 미국 대선에서 바이든 후보가 승리한 이후 해외공관에 미국을 자극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지난달(국가정보원 보고)에 알려지기도 했다.
북한 당국 입장에서는 강경한 대북 인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차기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두렵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대외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며 소외되는 상황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런 딜레마가 ‘만만한’ 한국을 상대로 한 막말 도발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여정의 막말 재개는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인 한국을 상대로 언어 도발을 감행하면서 미국의 안테나를 잡아두려는 계산에서 나왔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김여정의 막말 재개는 북한 내부 상황과도 관련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내년 1월 초에는 8차 노동당 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헌데 지난 4일 <노동신문>은 “내년 1월 하순 최고인민회의 14기 4차 회의를 소집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1월에만 커다란 정치행사를 두 차례나 개최하는 것이다. 중요한 ‘잔치들’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강 장관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으로 김여정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1월에만 큰 행사를 두 차례나 치를 만한 이유가 있을까?
이 같은 정황은 북한 내부에서 코로나 확산세가 심상치 않음을 나타내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바이든 행정부의 출범에 따른 대미 정책의 정립 필요성도 작용했겠지만, 내부적으로 볼 때, 북한 당국이 내년 1월에 당 대회와 최고인민회의를 모두 개최한다는 것은 그만큼 코로나 확산세가 가중되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데일리NK>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지난 11월 1일 기준으로 국가 지정 시설 누적 격리 인원이 총 8만 1000명이라고 집계했다. 이 같은 수치에는 군(軍) 내부 격리자 수가 포함되지 않아 실제 코로나 의심 증상으로 격리된 인원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고 <데일리NK> 측은 보도한 바 있다(北 내부 집계 결과… “코로나 의심 누적 격리자 최소 8만명”, 2020,11,4). 의심 환자들이 모두 확진자라고 볼 수는 없으나, 이 가운데 의미 있는 숫자는 코로나19의 확진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당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코로나 확진자 제로(0)’는 거짓일 공산이 크다. 이 부분을 강 장관이 건드렸기 때문에 김여정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북한 당국이 굵직한 정치행사들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는 코로나 방역의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한 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확진세를 숨기려고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북한 당국은 한국 정부의 코로나 방역 협력과 보건 협력 제안을 받아들여 주민들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아울러 김여정의 이번 막말이 또 다른 도발로 이어지면서 남북관계가 다시 냉각기로 접어들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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