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드라마 보고 사랑이 뭔지 알았죠”

▲ 압록강변에 나와있는 북한 여성들의 얼굴 표정이 굳어 있다. ⓒ데일리NK

“북조선에서 나와 천대라는 천대는 다 받고 살았죠. 아무리 울어봤자 중국땅에서 우리를 동정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4월 5일 선양(瀋陽) 시내 한 다방에서 만난 탈북여성의 손등 위로 눈물 방울이 연신 흘러내린다. 세상 풍파를 다 거친듯한 거친 손과 그을린 피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녀의 과거를 고스란히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랬다. 1990년대 대아사 이후 지난 10년간 북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이 시기 여성들은 굶어 죽어가는 남편과 자식, 부모를 먹여 살리기 위해 산과 농장, 장마당을 떠돌았다.

여성들은 자신의 키만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밤낮으로 장마당을 돌아다녔다. 중국 친척방문을 하고 돌아올 때는 물건 하나라도 더 챙겨 두만강을 넘기 위해 보따리 수십개를 비닐로 감아 몸에 둘러맸다. 그렇게 구한 식량은 남편과 자식의 목구멍으로 고스란히 넘어갔다.

그렇게 가족들을 먹이고 입히며 10년간의 세월을 버텨냈다. 극도의 궁핍함을 견디지 못하고 두만강을 건넜던 여성들은 인신매매꾼들의 표적이 돼 중국 시골 마을 이곳 저곳으로 팔려나갔다.

14살 소녀부터 50살 아주머니까지 가림이 없다. 인간의 존엄은 사라지고 나이와 미모의 수준에 따라 값이 매겨졌다. 이들은 중국 산골 오지로 팔려나가 성적 학대와 폭력, 강제노동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됐다.

데일리NK는 중국에 거주하는 탈북여성 5명과의 심층 인터뷰를 가졌다. 이들은 길게는 7년, 짧게는 지난해 말 탈북한 여성들이다. 이 탈북여성들을 통해 2007년 현재 북한 여성들의 생활상을 들여다 봤다.

1997년부터 2006년까지 10년의 시차를 두고 두만강을 건넌 이 여성들은 “조선에서는 여성으로써의 삶이 철저히 무너졌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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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23세)-2006년 탈북, 평양 소재 대학 중퇴

안미란(43세)-2003년 탈북, 함북 회령 출신, 인신매매 피해

최경자(35세)-1997년 탈북, 함남 함흥 출신, 조선족 남편과 결혼

이은희(39세)-2000년 탈북, 평북 신의주 출신, 달리기 장사

강순녀(40세)-2002년 탈북, 양강도 혜산 출신, 인신매매 피해


◆ 생계 책임자로 떠오른 北 여성=국가 배급제에 전적으로 의존해왔던 북한 주민들은 1990년대 식량 배급이 전면 중단되면서 최악의 식량난을 겪게 된다. 지금까지 국가가 지정해 준 기업소나 농장에서 일하며 국가가 주는 배급을 타왔던 사람들은 배급이 끊어지자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이 때부터 굶주림에 신음하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여성들이 장사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끼니를 이어가기 위해 시작했던 장사가 이제는 북한 경제 전체를 떠받치는 터전이 됐다.

안미란 씨는 지난 10년은 북한 주민들 스스로 생활방식을 터득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애들이고 부모고 같이 굶어죽었다. 그러다가 여자들이 장사에 나서기 시작했다. 원산에 살던 한 여자는 물고기를 등에 지고 농촌에 가서 강냉이로 바꾸는 일부터 시작하더니 98년도에는 집에 전화를 놓고 장사를 중개하더라. 이제는 국가를 믿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 겠구나’라는 생활방식을 스스로 터득했다.”

김영순 씨는 “식량난 이전 시기에는 대체로 남자들이 생계를 책임졌다. 김일성이 한때 여성간부들을 많이 등용하라는 교시도 내리긴 했지만, 여자 간부의 급수에 맞춰 남자의 직급도 올려주는 등 가정의 구조가 남자 위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 이후 여자들 90% 이상이 가정을 책임지게 되면서 남자들을 (불필요하다는 의미의) 낮전등, 불편이, 멍멍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들이 처음 장마당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먹는 장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돈이 모이고 장사 방법에 눈이 트이면서 달리기(지역을 이동하며 물건을 중계 또는 판매하는 행위)와 장마당 장사에도 뛰어 들었다.

안 씨는 “처음부터 장사를 시작하지 못한 여자들도 나중에는 다 장사에 뛰어들었다. 써비차(화물차)나 열차를 타고 다니며 달리기 장사에 나섰다. 여자들은 날마다 50kg짜리 배낭을 두개 세 개 들고 다닌다. 열차에 많은 사람이 타다보니 떨어져 죽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장사를 계속했다”고 덧붙였다.

장사를 통해 돈을 벌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규모도 커지면서 남성들도 직장에 출근하는 대신 장사에 나서는 경우가 생겼다고 한다. 최근에는 북한 당국이 장마당 단속을 비정기적으로 벌이면서 소규모 장사의 경우 타격을 입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이은희 씨는 북한에 있을 때 장사로 돈을 제법 모았었다고 한다. “800원을 가지고 처음 장사를 시작했다. 국수 장사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신발 등 공업품도 팔았다. 화교한테 물건을 받아서 평양에 팔았다. 남자들도 나중에는 장사의 중요성을 깨닫고 장사에 동참하면서 생활수준은 조금씩 나아졌다. 2005년도 들어서는 통 강냉이를 먹는 집은 많이 적어졌고, 대신 쌀 먹는 집이 40~50% 정도로 늘어난 것 같다”고 했다.

그녀는 “그것이 다 조선여자들이 입에 악을 물고 물건을 팔러 다녔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 매 맞는 아내…무너지는 북한 가정=북한 여성들이 이렇듯 가정의 생계를 주도적으로 책임지고 있지만, 가정에서 겪는 불평등한 대우는 여전하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에 대한 가정폭력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대한변호사협회가 발간한 ‘2006 북한인권백서’의 탈북자 인터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90.7%가 가정폭력을 목격했거나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북한 사회 전체의 현상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여타 국가간 부부폭력 발생 비율(미국 가정 16.1%, 한국 가정 31.4%, 일본 가정 17.0%)에 비해 극단적으로 높은 것이 사실이다.

이 씨는 중학교 여선생이 시집을 와서 당한 가정폭력 사례를 생생히 증언했다.

“신의주사범대학 졸업생이 옆집에 살고 있던 소년회관 축구지도원에게 시집을 왔다. 그 여성은 중학교 교원(선생님)으로 인물도 좋고 성격도 원만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남편이 온 동네 다 들리도록 때리기 시작하더라. 사람을 그렇게까지 때릴 것이라고 상상도 못해봤다. 재떨이 던지는 것은 기본이고 손등을 식칼로 긁고 담뱃불로 지지고, 삽자루로 머리를 때렸다. 그 여자는 결국에는 학교까지 그만뒀다”고 직접 목격한 사례를 말해줬다.

더 큰 문제는 여성들이 이렇게 극단적인 폭력을 경험하면서도 가정을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봉건사상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북한에서는 시집 간 여성이 친정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웬만해서는 용납하지 않는 편이다. 더군다나 가정폭력이 워낙 빈번히 일어나다 보니 이혼의 사유조차 되지 못한다고 한다.

안미란 씨도 결혼 직후부터 남편의 구타와 외도로 고통받다가 어렵게 이혼이 성사된 경우다.

“맞아도 대꾸질을 안 하니까 더 약이 오른다고 때렸다. 고막이 터져서 소리가 안 들리고 갈비뼈가 나가기도 했다. 얼굴에 피멍이 말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이혼이 안 된다. 매 맞는 거나 바람 피는 걸로는 이혼을 안 시켜 준다. 법에다 신소를 해도 너희끼리 해결하라고 한다.”

한편, 평양에서 대학을 다녔던 김영순 씨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남녀평등에 대한 의식이 성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어머니들은 때리는 남자한테는 절대 딸을 시집 안 보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대학 교육까지 받은 사람은 잘 안 그러는데 못 배운 사람들이 여자를 때린다. 여자들이 매 맞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사람들이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나 대학생을 중심으로 여자를 존중해주는 문화도 생기도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여성들이 전통적 여성의 역할과 경제적 역할까지 동시에 담당해야 하다 보니 정상적인 가정 생활이 유지되지 않는 현상도 발생했다. 경제 활동의 일선에 나서면서도 자녀 양육과 집안 살림의 짐까지 떠안아야 했다.

이은희 씨는 “장사에 바빠서 아이들 재롱 볼 시간도 없었고, 남편과 오순도순 지낼 시간도 없었다. 아침에 눈뜨면 애들 밥 해서 먹이고, 탁아소 보내고, 내 일도 해야 하고, 퇴근하면 학습하고 밤이면 피곤해서 드러눕고 만다. 언제 들놀이가고 다정하게 보낼 시간이 있겠는가. 남편과 밤에 누워 다음 날 일을 얘기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한다”고 털어 놓는다.

이 씨는 “아이들이 부모의 정을 모르고 크고, 엄마도 너무 힘드니까 애들한테 애틋한 정이 없다. 배급 줄 때도 힘들었지만 미공급 시기 여자들은 살아갈 걱정으로 더 힘들었다. 중국에 나와서 한국 영화를 보고서야 사랑이 어떤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며 고개를 떨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