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800만불 ‘대북 인도적 지원’ 확정…지원 시기는 추후 결정

정부가 21일 국제기구를 통해 북한 취약계층에 8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심의·의결했지만, 끝내 구체적인 지원 시기나 규모는 남북관계를 고려해 추후 결정하기로 했다. 어떻게 해서든 꽉 막힌 남북관계 풀어가야 한다는 데서 인도 지원을 재개키로 했으나, 북한의 도발로 국내외 여론이 악화되자 지원 시기와 규모를 조율하는 선에서 타협한 셈이다.

하지만 정부의 이 같은 결정을 두고 대북 인도지원의 ‘원칙’과 ‘절차’가 모순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대북 인도지원과 정치·군사적 상황을 분리하는 게 원칙이라 천명해놓고, 실제 지원 시기와 규모는 남북관계 상황을 고려해 결정하겠다는 게 상충되는 입장이란 것이다.

정부가 대북 인도지원의 원칙과 절차에 관해 모호한 설명으로 일관한다는 지적은 지난 14일 인도지원 검토 계획을 발표할 때부터 불거졌다. 당시 정부 당국자는 북한 영유아·임산부의 보건 실태가 열악해 인도지원이 시급하다는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북한 6차 핵실험의 여파가 채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시기부적절하다는 비판에도, 정부는 굳이 몇 년이 지난 북한 의료보건 실태 자료까지 제시하며 인도지원의 시급성을 주장했다.

물론 당시에도 정부는 구체적 지원 시기와 규모는 남북관계 상황을 고려해 결정하겠다고 부연했고, 이는 21일 제286차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에서 결정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막상 21일 열린 교추협은 지난 14일에 이미 밝혔던 북한 취약계층에 대한 영양지원사업을 심의·의결했을 뿐, 지원 시기와 규모 결정은 남북관계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며 미확정 상태로 남겨뒀다. 공여금 800만 달러 지원은 확정됐지만, 이를 언제 얼마만큼 분할해 지원할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것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800만 달러 공여방침은 결정됐다”면서 “이를 언제 얼마만큼 분할해 지원할지는 시기와 규모, 방법은 추후 남북관계 상황과 국제기구 협의 등 종합적 판단 하에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가 인도지원과 분리하겠다는 ‘정치·군사적 상황’과 지원 시기 및 규모 결정의 조건이 되는 ‘남북관계 상황’의 의미에 대해선 여전히 구체적인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이미 정부가 지난 15일 북한 탄도미사일 도발에도 대북 인도지원 계획은 유효하다고 밝혔던 만큼, 지원 시기와 규모를 결정할 ‘남북관계 상황’이 무엇인지를 두고 제각각의 해석만 난무할 여지가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남북관계 상황이 뭔지 특정하기 보다는 전반적인 상황을 보겠다는 것으로 이해해달라”면서 “정부가 교추협 (인도지원 결정을) 발표한 데 대해 국민의 관심과 우려가 있었는데 이를 토대로 결정된 것”이라고 답했다.

이는 결국 정부가 제재와 인도지원을 분리하겠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대북 인도지원을 결정했지만, 국내외 대북 여론이 악화된 상황에서 마냥 지지를 얻기 어려워지자 ‘남북관계 상황’ 고려하겠다는 조건을 추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때문에 정부가 구체적인 공여 시기와 규모 결정을 미루면 미룰수록 인도지원과 정치·군사적 상황을 분리하겠다는 원칙도 사실상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정부가 남북관계 상황을 이유로 지원 시기와 규모 결정을 미룰수록 애초 밝혔던 북한 취약계층의 보건실태 시급성이란 지원 명분도 퇴색될 가능성이 있다. 통일부 관계자는 “인도지원 시급성을 고려해 연내에 국제기구 공여가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편 통일부는 이날 제286차 교추협 개최 결과를 발표하고 “유엔아동기금(UNICEF)과 세계식량계획(WFP)의 북한 모자보건·영양지원사업에 대한 남북협력기금 지원을 심의·의결했다”고 밝혔다. UNICEF의 아동 및 임산부 보건의료·영양실조 치료 등 지원사업에 350만 달러, 세계식량계획(WFP)의 탁아시설·소아병동 아동 및 임산부 대상 영양강화식품 지원사업에 45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로써 문재인 정부 들어 첫 대북지원이 이뤄지게 됐다. 국제기구를 통한 정부의 대북지원은 지난 2015년 12월 유엔인구기금(UNFPA)의 ‘사회경제인구 및 건강조사 사업’에 80만 달러를 지원했던 게 마지막이다. 앞서 보수 정부 시절에도 정치·군사적 상황과 무관히 인도지원을 이어간다는 원칙을 견지했지만, 지난해 1월 북한 4차 핵실험 이후 대북 인도지원은 전면 중단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