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처리 불투명 노린 北…초강수 대응에 오히려 ‘자충수’될 것

북한 김정남 피살 용의자로 북한 국적 남성 8명이 지목되는 등 범행 윤곽이 드러나고 있지만, 평양으로 도주하거나 북한 대사관에 은신한 것으로 추정되는 용의자들을 현지 경찰로 송환할 법적 근거가 없어 수사에 난항이 예상된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재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은 이번 사건을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과 협조해 수사 중이다. 인터폴은 용의자가 해외로 도피하면 ‘적색수배’를 내려 수색하고, 가입국들은 그의 경유지와 체류 정보 등을 공유해 수사에 협조하게 된다.


문제는 북한이 인터폴 가입국이 아니라는 것. 핵심 용의자들로 추정되는 리지현·홍송학·오종길·리재남 4명은 지난 13일 범행 직후 말레이시아에서 출국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아랍에미리트 두바이-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간 것으로 전해진다. 인터폴이라 해도 이들의 북한 내 행적은 파악할 수 없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북한에 용의자 송환을 요청해도, 북한이 거절하면 수포로 돌아간다. 양국 간엔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았기 때문. 이 조약은 외국에서 형법 및 형사법규를 위반한 범죄인이 자국으로 도주할 시, 외국의 청구에 따라 범죄인을 체포해 인도할 것을 약속하는 게 골자다. 북한과 말레이시아는 2009년 무비자 협정을 체결할 만큼 가까웠지만, 범죄인 인도 조약 체결엔 손을 놓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은 22일 북한 측에 평양으로 돌아간 4명의 용의자를 송환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다음 날인 23일 북한은 김정남 피살 사건은 한국과 말레이시아에 모략극이란 음모론만 내놨다. 사망자가 김정남이란 사실까지 숨기는 북한 당국이 수사에 협조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운 상태다.


“말레이시아 체류 용의자들, 대사관 은신 시 체포도 못해”


용의자로 추가 지목된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은 아직 말레이시아 체류 중인 것으로 확인됐지만, 체포 및 송환에 난항이 예상되는 건 마찬가지다. 두 용의자는 현재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관에 은신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현광성은 ‘외교관’이란 신분을 악용해 면책특권을 쓸 가능성이 크다. 국제법상 대사관 직원은 1961년 채택된 ‘외교관계에 관한 빈협약’에 따라 민·형사상 기소를 받지 않기 때문. 이 협약은 대사관 단순 행정 직원을 제외하고 대사와 공사참사관, 참사관, 1~3등 서기관 등 주요직책 전원에 적용된다.


국제법 전문가인 이규창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23일 데일리NK에 “면책특권이 적용된다면 현재로선 주재국(말레이시아)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추방밖에 없다”면서 “(현광성이) 말레이시아에 남아 있어도 자발적으로 수사에 응하지 않는 한 체포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물론 현광성이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한 고정간첩일 가능성도 있다. 말레이시아 외교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관 2등 서기관은 ‘유영남’이다.


이에 따라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은 현광성이 위장 간첩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이나, 체포 가능성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현광성이 정식 외교관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더라도, 국제법상 현지 대사관이나 영사관의 동의 없이는 주재국이라 해도 진입해 수사할 수 없기 때문. 김욱일 역시 대사관 내에 은신하는 한 체포가 어려운 상태다.


“‘사법처리 불투명’ 노린 北, ‘단교’ 등 말레이시아 초강수 대응 직면할 가능성”


때문에 북한 당국으로선 북한 국적 용의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쉽지 않은 상황을 ‘호재(好材)’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이번 사건에 대한 ‘공동 수사’까지 제안하고 나선 것도 배후를 은폐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말레이시아 당국은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 될 때까지 수사는 계속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칼리드 아부 바카르 경찰청장은 “북한 당국은 아직까지 수사 협조를 위한 그 어느 증거도 제출한 바 없다”면서 “하지만 북한 대사관이 반드시 수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성 발언까지 내놨다. 그는 또 “북한과의 공동 수사는 없다”면서 “우리(말레이시아 경찰)를 믿으라”고 확언했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경찰 수사를 계속 진행하는 동시에, 각종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는 북한을 겨냥해 외교적 압박도 가세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말레이시아 당국은 북한이 강철 대사를 앞세워 이번 사건을 ‘남한과 말레이시아의 모략극’이라 주장한 데 대해 큰 불쾌감을 표하고 있다.


앞서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강 대사를 초치해 “북한 주장은 외교적 무례”라고 반박한 바 있으며, 세리 나스리 아지스 말레이시아 문화관광부 장관도 북한을 ‘깡패국가(rogue nation)’이라고 비난했다. 세리 히사무딘 후세인 말레이시아 국방부 장관도 “북한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양국이 ‘단계적 단교’에 들어설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현지매체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당국은 강철 대사를 현지에서 추방하고 ‘외교상 기피인물’로 선언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주재국이 타국 외교관에 취하는 가장 강력한 조치로 평가된다. 일각에선 말레이시아 당국이 평양 소재 자국 대사관 폐쇄까지 고려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북한 간의 무비자 입국 조치를 폐기하는 조치도 거론된다. 앞서 싱가포르도 지난해 북한 4차 핵실험에 대응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가 시행되자, 이에 맞춰 북한과의 무비자 입국 조치를 폐기한 바 있다. 말레이시아까지 동(同) 조치에 동참할 시, 북한의 외교적 고립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으로선 범죄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어려운 말레이시아에서 김정남을 암살한 게 ‘신의 한 수’였다고 여길 수 있지만, 말레이시아 당국의 수사 의지와 추가 조치 검토 움직임으로 볼 때 이번 사건은 북한에 자충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가운데 우리 정부는 이번 사건을 국제사회에 공론화시켜 김정은의 인권 유린 행태를 재확인시키겠다는 방침이다. 오는 27일부터 내달 1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리는 제34차 유엔 인권이사회 ‘고위급 회의’에서도 김정남 피살 사건이 거론될 전망이다. 북한의 김정남 피살이 단순 자국민 살해를 넘어 반(反)인도범죄로 부각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