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김일성 광장 열병식을 아는가?

조선에서도 평양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집안 토대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

필자는 아무런 배경 없이 실력으로 원하던 대학에 당당히 입학했다. 대학 합격을 통지 받은 당시에는 세상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것 같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으로서의 단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필자의 큰 포부에 찬물을 끼얹은 것 중에 하나가 열병식 참가였다.

대학 진학한지 3일만에 열병식 참가자로 뽑혔다. 결국 필자의 대학생활은 ‘멀쩡한 사람이 병신 되어 나온다’는 열병식에서 시작됐다. 열병식이라고 하면 남조선 동포들은 학교 재식훈련 정도로 생각하는데, 조선에서 열병식은 1년간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혹독한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다.

조선에서는 김일성, 김정일의 생일과 조선인민군 창건 기념일,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 등에 학생, 노동자, 군대, 일반 시민들을 동원하여 김정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열병식 행사를 갖는다. 관객은 오직 김정일 한 사람이다. 김정일 한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일년 내내 피땀을 흘리며 행사를 준비한다.

대학생 열병식 참가자를 선발하는 기준은 딱 한 가지다. 그것은 바로 ‘키’다. 열병식 참가가 결정된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키재기’를 시작한다. 나는 작지 않은 키에 신입생이라는 이유로 단번에 선발됐다. 열병식이라는 것을 텔레비전에서나 가끔 봐왔던 나는 다가올 훈련이 얼마나 고되고 힘겨운 것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 대학이 1개 종대를 맡게 되었다. 1개 종대는 총 12개의 횡대로 되어 있다. 한 개의 횡대는 25명이 선다. 1횡대에는 키가 제일 큰 학생들이 서고 12횡대에는 키가 제일 작은 학생들이 서게 된다.

당 간부의 자제들은 훈련에서 제외돼

각 종대에는 종대를 책임진 대대장이 있고 그 밑에 정치부 대대장, 후방부 대대장이 정해진다. 또 그 밑에 중대장, 정치부 중대장이 있고, 그 다음 횡대장들과 부소대장, 비서들이 있다. 1개 횡대도 3개 분대로 나누어 분대장들이 또 있다. 이런 간부 역할은 보통 4학년과 3학년들이 도맡는다. 각 종대에서 간부 책임을 맡지 않는 학생들은 대부분 신입생들이다.

첫 훈련이 시작되었을 때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웃고 떠들면서 ‘실제로 장군님이 우리를 보러 나오시겠나?’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한 명, 두 명씩 훈련에 빠지는 사람이 생겼다.

당시에는 열병식에 참가하지 못할 사정이 생겼을꺼라고 생각했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훈련에서 빠진 대상들은 모두 당 간부의 자제들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결국 ‘키 재기’로 시작된 열병식 대오 선발은 철부지 1학년 학생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기숙사생들로 확정됐다.

한 개 대학이 1개 종대를 구성하기 때문에 열병식에 선발된 학생들은 오전에는 강의를 받고, 오후에는 학교 운동장에 모여 훈련을 한다. 학교 운동장의 그 먼지를 다 삼키며 훈련하면 저녁에는 입안에서 작은 모래가 씹힐 정도였다.

열병식 훈련의 첫 단계는 ‘몸 풀기’와 ‘발 끝 펴기’다. 예술 체조 선수들의 훈련 동작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훈련인데 매일 훈련과제들이 제시되고,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면 훈련이 끝나지 않았다.

첫 달은 대학운동장에서 훈련을 하고 다음 달부터는 주체사상탑 교양마당 아래에서 훈련을 했다. 그때부터 일부 학생들은 다리에 관절염이 생기기 시작한다. 강의시간에 밀려오는 졸음을 못 참아 교원들의 꾸중을 듣는 일이 빈번해지고, 환자가 계속 늘어났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훈련에 빠지면 엄한 추궁을 받았다.

주체사상탑 가로등불 모두 깨버리고 싶어

매일 오후 2시부터 시작된 훈련은 보통 저녁 7시에 끝나는데, 훈련이 끝나면 종대훈련교원이 훈련총화를 한다. 그때 지적된 학생들은 그 종대 차원에서 비난의 대상이 돼야 한다. 종대 총화가 끝나면 중대 별로 총화를 짓는다.

중대 총화에서는 훈련시간에 늦은 사람, 훈련에 불성실하게 참가한 사람, 훈련에서 지적 받은 사람들을 호되게 비판한다. 중대총화가 끝나면 소대, 분대 순으로 총화를 한다.

소대총화 역시 만만치 않다. 소대총화가 끝나면 분대별로 모이는데 분대장은 다음날 훈련에 늦지 말아야 하며 훈련에 성실하게 참가 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총화를 마무리 한다. 소대 총화까지 마치려면 보통 1시간 반이 소요된다. 그러나 총화가 끝났다고 해서 하루 훈련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총화에서 지적 받았던 학생들은 밤 9시에 또 다시 보충훈련을 해야 한다. 그때처럼 주체사상탑 공원의 환환 가로등 불빛이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가로등 불빛이 없으면 보충훈련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건 말건 돌맹이를 집어 던져서라도 모든 가로등을 깨버리고 싶었다.

기숙사 학생들이 지친 몸을 끌고 대학 기숙사로 돌아가려면 보통 걸어서 30분~1시간이 소요된다. 그 시간까지 버스가 없으니 또 걸어야 한다. 기숙사의 저녁 식사는 이미 끝난 상태라 저녁을 먹을 수도 없다.

발이 퉁퉁 부어올라 잠자기도 힘들어

굶는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이 ‘물’이 없는 고생이다. 기숙사에 물이 나오지 않으니 빨래는 둘째치고 세수도 하기 어렵다. 하루 종일 먼지를 뒤집어 썼기 때문에 도저히 그대로 잠자리에 들 수 없다. 그래서 몇 명씩 짝지어 대학주변 아파트 앞에 있는 물 펌프를 찾아간다. 얼굴에 물이라도 묻히고 나면 밤 11시가 넘는다.

잠자리에 누우면 그야말로 온 몸이 땅속으로 꺼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제대로 깊은 잠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찬물로 씻고 나도 발이 퉁퉁 부으며 열이 올라와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밤새 뒤척여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도 여기까지는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삼복더위가 시작되니 그전에 고생은 고생 축에도 못 끼는 것이었다. 여름이 되자 오전 강의조차 못 듣고 하루 종일 훈련에 나가야 했다.

평양은 6월만 되도 무더위가 시작된다. 더욱이 우리 훈련장이었던 주체사상탑 교양마당은 나무 한 그루 찾아 볼 수 없는 콘크리트 바닥이다. 한낮의 따가운 햇빛이 콘크리트 바닥을 뜨겁게 달구어 놓으면 쉬는 시간에도 엉덩이를 붙일 수 없다.

아무리 더워도 두꺼운 적위대복의 단추를 풀지 못했고, 머리에 쓴 모자도 벗지 못하게 했다. 등을 흥건히 적시던 땀방울은 어느새 하얀 소금으로 변하면 몸 안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빨래도 제대로 못 하는 지경이었으니 제 몸에서 나는 땀 냄새가 그렇게 역겨울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게 됐다.

열병식 훈련은 휴일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루라도 쉬면 그만큼 다리가 굳어진다고 하여 일요일에도 계속 훈련을 시켰다. 그때 제일 얄미웠던 아이들은 부모의 권력 덕택에 훈련에는 참가하지 않고 ‘보장조’에 속해 놀기만 하던 학생들이었다.

‘보장조’란 열병식 훈련에 필요한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하여 종대마다 15명 정도의 보장성원들을 두는 특별 소조인데, 훈련하는 학생들을 위해 하는 일은 하나도 없고, 훈련지도교원들의 잔심부름이나 술상이나 차려주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열병식은 다리와, 배를 뒤틀리게 만들어

아예 훈련 대오에서 열외 될 만큼 부모의 배경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중간 간부들의 자식들이 ‘보장조’에 속하게 된다.

열병식 대오의 표준 보폭 길이는 70cm이다. ‘120보 주악’에 맞추어 발끝을 곱게 펴고 두 발을 지상에서 60cm까지 교차차기를 해야 한다. ‘교차차기’라는 것은 한발로 땅바닥을 힘껏 때리면서 그 반동으로 다른 발을 들어올리는 것인데, 온 몸의 힘을 모아 힘껏 콘크리트 바닥을 하루 종일 차고 나면 내장이 온통 뒤틀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열병대오 내에서 기계처럼 움직일 것을 요구받았다. 말처럼 사실상 우리는 기계였다. 정치부대대장이나 정치부중대장들은 쉬는 시간마다 훈련대오 앞에 나서서 “행사를 사수하겠다는 투철한 의지를 가지면 육체적 고통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고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열병식 준비는 다리와 배 속만 뒤틀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 까지 뒤틀리게 만든다. 아침 7시30분에 종대차원에서 대열 검열이 있다. 그 때 목 칼라, 바지주름, 종대마크, 허리띠, 단추 등을 제대로 착용했는지 검열하고, 종대 별로 앉아서 노동신문사설이나 김일성 김정일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자료를 읽는 독보사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훈련의 쉬는 시간마다 정치교양사업을 진행한다. 잠시도 몸과 머리가 쉴 틈이 없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열병식 훈련 총지휘부에서 조직하는 훈련검열이 있는데 그때마다 훈련강도가 배로 올라 간다. 김일성광장 주석단 앞 도로의 길이는 216m다. 김정일 생일 2월 16일을 기념하기 위해 216m로 만든 것이다. 열병식 참가자들은 216m의 거리를 1분 40초 안에 통과해야 한다. 1분 40초! 얼핏 보면 너무도 짧아 보이는 이 순간을 위해 이 수 천 시간 동안 연습 해야 했다.

첫 훈련을 시작한지 거의 반년이 지나자 우리 훈련대오는 4.25여관으로 입소했다. 그 때 계절은 이미 겨울의 문턱에 이르렀다. 4.25여관에 입소할 때 훈련용 겨울 솜옷, 신발 등 모든 것을 학생들 자비로 구입했어야 했는데 동복과 허리띠를 구하는 일이 정말 어려웠다.

4.25여관은 평양시 사동구역 송신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국가적 행사나 회의에 동원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꾸려진 곳이다. 외국사람들 눈에는 한심하게 보이겠지만, 그래도 조선에서는 4.25여관의 시설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방 하나당 1백 명이 생활해야 하지만 조선 기준으로는 최신 설비였다. 그리고 식사 질도 굉장히 높았다. 대학기숙사에서 강냉이 밥 한 숟가락 먹고 훈련하던 우리들에게 잡곡밥과 콩기름이 뜬 배추국은 진수성찬처럼 보였다. 일주일마다 달걀 1개씩 공급되었으며, 매일 사탕 15알씩 간식도 지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