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사망 5천명 대형열차사고 있었다”

지난해 북한에서 용천역 폭발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많은 인명피해가 난 것은 외부에 알려졌다. 그러나 용천역 사고는 96년에 발생한 자강도 송원군 ‘개고개’ 열차전복사고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96년 당시 사고차 현장에 다녀온 적이 있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확히 96년 12월 3일 새벽 1시경, 만포-해주행 열차가 전천군-희천시 구간을 통과하면서 ‘개고개’에서 발생한 열차전복사고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무려 5천명 정도가 사망한 사상초유의 대형 열차사고였다. 다만 용천역 폭발사고는 휴대폰으로 외부에 알려졌고, 이 사건은 당시 통신수단이 변변치 않아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차이밖에 없다.

북한에서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대형사고가 한 두 건이 아니다. 그중 ‘개고개’ 열차전복사고는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견인기 1대로 무리한 운행, 제동장치 작동 안돼

1996년 12월 3일, 당시 북한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 기간이었다. 최악의 기근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떠돌아 다니던 시기다. 그때도 전기가 없어서 자강도 만포에서 출발하여 황해도 해주로 가는 열차가 일주일만에 운행되었다.

북한의 북부철길은 일제 때 건설한 것으로서 이미 60년이 넘었다. 침목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교체하지 않아 썩었고, 노반은 정리되지 않아 굴곡이 심했다. 게다가 산이 너무 많아 개고개에서 희천시까지의 구간은 터널이 수십 개나 된다.

열차사고의 전후 사정은 이러했다.

전천에서 희천으로 가는 철길은 내리막으로 경사가 매우 심하다. 그래서 속도조절을 위해 견인기 한 대는 앞에서 끌고, 차량 맨 뒤에 있는 견인기 한 대는 제동을 걸면서 내려가야 한다. 또 올라갈 때는 한 대가 앞에서 끌고, 뒤의 한 대는 밀어줘야 통과하는 위험구간이었다.

만약 공기펌프나 제동기에 문제가 생기면 열차는 내리막길에 그냥 가속도가 붙어 내려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 열차를 안전지대로 유도하기 위한 보조레일이 건설되어 있는데, 보조레일 역시 낡은 것이었다.

평소에도 이 구간에서는 여객열차나 화물열차가 매년 한 두건씩 사고가 발생한다. 당국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투자할 돈이 없어 고치지 않고 그대로 운행시켰다.

낭떠러지 아래로 객차들 굴러

사고 당시 열차편성은 견인기 포함 13개 차량이었다. 사고 방지를 위해 견인기 두 대를 사용해야 했지만 워낙 견인기가 모자라는 상황이어서 한 대만으로는 열차를 운행하게 되었다. 기관사는 철도국 사령장의 지시와 자신의 ‘실력’만을 믿고 운행하기로 한 것이다.

규칙대로 하자면 직류정격전압 3,300v(볼트)로 운행하게 되어 있었으나 전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 2,300~2000v의 낮은 전압으로 운행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동기는 역학적으로 모멘트가 작아지고, 회전수가 떨어지면서 원래의 마력을 내지 못하게 된다.

만포-해주행 열차는 북부일대를 횡단하는 열차로, 황해도와 평안도, 자강도 사람들이 대부분 이용한다. 또 일주일 동안 운행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길 떠났던 사람들이 한데 몰려 발디딜 자리도 없어 열차 지붕에까지 승객들이 올라가 있었다. 열차에는 군인, 장사꾼, 꽃제비, 그리고 자강도에서 약초를 사서 식량으로 바꾸려던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칸에 어림잡아 5백명씩, 12칸에 6천명 정도가 탔다.

새벽1시경, 열차가 출발해 열 개의 터널을 빠져나 왔을 때, 갑자기 공기가 새면서 제동에 문제가 생겼다. 통제불능이 된 열차는 경사지 레일을 따라 마치 관성열차(롤러코스터)처럼 사정없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것도 모르고 “기차가 이 속도로 내려가면 날 밝기 전에 집에 도착할 것”이라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 객차 안에는 설 자리가 없어 열차 지붕 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기차가 ‘구제불능’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뛰어내리려고 했으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뛰어내리지 못하고 바람에 날려가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기관사는 제동기가 말을 듣지 않자 신속히 보조레일이 설치된 대피노선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속도가 워낙 빨라 다른 도리가 없었다.

견인기가 대피선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견인기와 객차 사이의 고리가 빠지면서 수백미터의 낭떠러지로 객차들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12개의 객차가 여기저기 구르면서 산비탈로 떨어졌는데, 그 광경은 전쟁을 겪은 것과 같은 처참한 것이었다.

다리가 끊어진 사람, 머리가 없는 사람, 머리가 터져 피가 낭자한 시체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졌다. 부상자들도 치료를 받지 못해 계속 죽어 나갔다. 제일 많이 죽은 사람들은 군인들이었는데, 군인들이 탔던 칸이 견인기 바로 다음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형사고, 언제든 일어날 수 있어

사고 후 당국은 주변의 북한군 기계화 부대들을 동원하여 탱크로 객차를 끌어내어 부상자들을 꺼내고 죽은 시체들은 걷어내었다.

당국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절대 소문을 내지 못하게 하고, 흉흉한 민심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간첩’들이 레일의 못을 뽑아 열차를 전복시켰다고 떠들었다.

이 사고로 최소한 5천여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항간에서는 2천명이라고 말했지만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들은 이를 부인했다. 필자의 옆집 사람도 아내가 부채마(약초 일종)를 사러 자강도에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했는데, 끝내 시체도 찾지 못했다.

당국이 조사에 나섰다. 당시 군 보위사령부(사령관 원응희 대장)가 조사를 맡았다. 조사가 끝난 후 운전을 담당했던 기관사와 개천철도총국 사령장, 현장 철길대장 등 7명에게 사형이 언도됐다. 개천철도국 산하 삼십여 명의 간부들이 책임을 지고 해임됐다. 사고 후 희생자들의 집에 기다리는 사람대신 검은 데트론 양복감 하나가 위로금 대신 전달됐다.

‘개고개’ 열차전복사고는 민생을 등한시 한 김정일 정권이 저지른 또 하나의 인재(人災)라고 할 수 있다. 평소에 주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제대로 살폈으면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사고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정권이 자신의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급급해 하는 한 이같은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