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모란 전시장 식당에서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는 김 모 씨가 손님들 앞에서 기타연주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 반주되고 있는 곡목은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영상=데일리NK·국민통일방송
진행 : 최근 북한에서 한국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삼지연관현악단이 불렀던 이선희의 ‘J에게’가 벌써부터 화제입니다. 북한 사회 이모저모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설송아 기자, 관련 소식 전해주시죠.
기자 : 이들의 공연이 한국 매체를 통해 방영되면서 이선희의 ‘J에게’가 신 유행곡으로 떠오를 기세입니다. 이에 대해 평안북도 소식통은 20일 데일리NK와의 통화에서 “공연을 봤다. 다른 노래는 다 알겠는데 J에게는 처음 들어봤다. 배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북한에서 몰래 한국 TV를 보는 주민들이 있거든요. 다시 한 번 매체의 힘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대중음악은 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힘이 대단하거든요.
암튼 가물(가뭄)의 단비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한국 가요가 주민들의 굳어졌던 감성을 자극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겠는데요. 특히 이선희 ‘J에게’는 기혼 여성들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하는데요. 90년대 평양에서부터 유행했던 ‘사랑의 미로’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이 시간에는 당국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이 한국 노래를 부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연대별 유행가를 통해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진행 : 북한에서 한국 노래가 유행했던 게 최근 일이 아니었군요. 과거에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기자 : 1990년대 들어서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던 대표적인 한국 가요는 ‘사랑의 미로’, ‘애모’, ‘당신은 모르실거야’ 등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미로는 이번에 한국에 왔던 삼지연관현악단도 불렀었죠. 암튼 저에게도 추억이 있는 곡인데요. 다름이 아니라 1991년 사로청(현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일꾼 강습초청으로 평양시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기숙사에 평양시 청년일꾼들도 함께 있었는데, 통기타로 ‘사랑의 미로’를 치면서 노래 부르던 청년 간부에게 반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한국의 대중가요는 선율이 간결해 음악지식이 없어도 쉽게 따라할 수 있었거든요. 그냥 몇 번 듣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후 공장으로 내려와 오락회 때 그 노래를 불렀는데요. 잘 따라하더라고요. 한국 노래인줄은 누구도 몰랐고요. 1995년도에는 도시든 농촌이든 젊은이들은 누구나 즐겨 불렀습니다.
진행 : 자연스럽게 북한 주민들 속에서 퍼져 나갔던 것이군요. 2000년대 이후에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기자 : 2000년대 들어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봇물처럼 북한에 퍼져 들어갔죠? 그러면서 이른바 삽입된 노래들이 바로 유행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유행 폭의 넓어졌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대표적으로 천국의 계단의 ‘보고 싶다’, 공동경비구역의 ‘이등병의 편지’ 등입니다. 또 평양노래자랑에서 소개됐던 송대관의 ‘네 박자’, 주현미의 ‘또 만났네요’도 CD로 퍼지게 됐습니다.
2010년대에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평양 스타일’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고요. 거북이의 ‘빙고’ 등 노래 제목이 영어로 된 가요들도 초·고급중학교(우리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진행 : 듣고 보니 북한사회에서 퍼지는 한류(韓流)는 가요부터 출발했던 것 같네요. 북한 당국이 제대로 된 단속을 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요?
기자 : 그렇습니다. 북한 당국이 당혹할 만도 한 거죠. 최근에는 대학생들과 고급중학교 학생들도 USB메모리나 MP3을 소유하고 있는데요. 한국 노래를 이어폰을 통해 걸으면서 듣는다고 하거든요.
2017년도 탈북한 평안남도 출신 이 모 씨는 “단골로 몇 년 동안 거래하던 40대 평양여성이 있었는데, 핸드폰에 한국 노래 10곡정도 저장하고 쉴 때마다 들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는데요. 그러니까 ‘사랑해서 미안해’, ‘백만 송이 장미꽃’, ‘옥경이’, ‘여정’, ‘화장을 고치고’ 등을 즐기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 평양 여성의 남편이 중앙당 간부였다고 하는데요. “간부일수록 돈주(신흥부유층)일수록 한국 노래를 더 좋아하고 즐긴다”고 합니다.
진행 : 왜 이렇게 한국 노래가 북한 주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걸까요?
기자 : 이 방송을 청취하고 계시는 북한 주민들도 많이 공감하실 겁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들도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는데요. 바로 “내 마음을 치료해줬다”는 겁니다. 원래 음악은 고유한 감정의 산물이 아닙니까. 그러나 북한의 음악예술은 당국의 소유물입니다. 작곡이든 작사든 우상화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북한 영화, 노래가 경직되어 있고 획일적이거든요. 듣고 볼 재미가 없습니다.
평안북도 소식통과 지난 설 연휴에 통화했었는데요. “여기(북한) 노래는 수령이 없으면 노래가 안 되고 남조선(한국) 노래는 사랑이 없으면 노래가 안 된다”고 말해서 한참 웃었어요. 일반 주민의 단순한 평가였지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감정 동물이니까요.
암튼 북한 주민들에게 한국 노래는 진짜 인생을 경험하게 하는 매력을 주는 것 같습니다. 노래에 몰입하다보면 현실에서 벗어나 자기를 느낄 수 있거든요. 한국 노래를 부르며 혼자 울고 웃던 북한 여성들 지금도 선합니다. 특히 시국이 복잡할수록 당 간부들에게도 한국 노래는 정신을 맑게 해주는 피로회복제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행 : 의미가 있는 말이군요. 이선희의 ‘J에게’가 왜 유행할 조짐을 보이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기자 : 아마도 ‘J에게’는 지나간 추억을 아련하게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J 우리가 걸었던/ J 추억의 그 길을/ 나 오늘도 조용히 그대 그리워하네~” 서로 사랑하면서도 결혼하지 못한 아픈 현실을 대변한 게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암튼 최근에는 도시 여성들이 결혼을 포기하고 독신을 택하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까지 포기하는 건 아니라는 건데요. 이 같은 힘든 현실에 ‘J에게’는 영혼을 달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고 판단됩니다. 말라버린 감정을 되살린다는 겁니다. 이렇게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한국 노래가 북한에서 많이 불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진행 : 하지만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에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 아래 한국의 노래를 비롯한 자본주의 문화를 통제했었던 건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국 노래가 많이 퍼져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인데, 이것이 결국 북한 체제에도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기자 : 2000년대 중반부터 ‘바위섬’, ‘홀로아리랑’ ‘아침이슬’ 등이 북한 매체로 방영되었거든요. “내 마음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이 가사가 주민들의 마음에 닿으면서 애창곡이 되자, ‘아침이슬’은 바로 금지곡으로 되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는 ‘한 곡의 노래가 총포탄보다 무섭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민들이 무지몽매해야 통치하기 쉽겠지만요. 생일 축하 노래마저 한국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데 ‘수령 결사옹위’ 선전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북한 당국은 세뇌 교육은 이미 낡았다는 점을 하루 빨리 인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