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Out NK] 준(準) 왕조 체제·1인 독재 더욱 강화한 김정은 

[김정은 집권 10년⑪] 현실 등판 순간부터 '지도자' 지위 확고...선대처럼 도전 세력 잔혹히 '제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김정일 사망 10주기(17일)를 맞아 시신이 안치된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18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사진=노동신문·뉴스1

최근 한국에서는 김정은 집권 10년이 되는 시기에 즈음해서 그동안의 통치에 대한 평가가 이어지고 있는데 ‘김정은이 핵 능력을 강화했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으로 주민들의 경제난이 가중됐다’라는 것으로 수렴되고 있다.

통일부에서 배포(12.16)한 ‘김정은 정권 10년 관련 참고자료’나 모 일간지가 ‘핵 고집으로 주민에 고통 안긴 김정은 집권 10년’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사설은 이런 평가를 대변하고 있다.

김정은은 권좌에 오른 직후에 개정(2012.4)한 헌법에서 ‘핵보유국’임을 명시한 데 이어 1년 뒤인 2013년 4월에 ‘자위적 핵보유국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라는 총 10개 항의 법령을 채택하는 등 강력한 핵·미사일 능력을 보유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3차 핵실험(2013.2.12.)을 시작으로 4차례의 핵실험을 강행하는 한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5형 시험발사(2017.11)에 성공하면서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김정은은 이런 핵 능력을 바탕으로 2018년 1월 신년사에서 “핵 단추가 내 책상 위에 놓여있다”라며 미국을 대놓고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모한 핵 능력 강화는 국제사회의 제재를 불러왔고, 경제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연도별 경제성장률이 2016년까지는 소폭이나마 플러스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2017년부터는 줄곧 가파른 마이너스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상의 평가는 눈앞에 나타난 현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나 다를 바 없어 이견(異見)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집권 기반이 불안정했던 김정은이 지난 10년간 당(총비서)·정(국무위원장)·군(최고사령관)에서 최고 직위를 확보하며 통치체제를 공고화하는 등 정치적 위상을 점진적으로 확보해 왔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견해를 다소 달리한다.

상당수의 전문가들이 ‘2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지도자 지위를 물려받은 김정은이 과연 선대(先代)와 같은 권위를 유지하면서 북한을 지도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내내 울먹이는 김정은의 모습은 이런 회의감을 더해 주었다.

이 때문에, 눈이 내리는 가운데 진행된 김정일 장례식(2011.12.28.)에서 김정은과 함께 운구차를 옆에서 호위한 7인방이 당분간은 북한을 이끌어 나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당시 운구차 7인방은 장성택 당 행정부장을 비롯해서 리영호 총참모장,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김정각 총정치국 제1부부장,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과 김기남·최태복 당 부위원장이었다. 하지만 이런 예측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김정은은 장례식 불과 이틀 뒤인 12월 30일에 최고사령관에 추대됨으로써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는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마오쩌둥)라는 공산주의자 전래의 군사관에 따른 것으로, 김정일도 정확히 20년 전인 1991년(12월 24일)에 다른 직책에 앞서 최고사령관에 오른 바 있다.

그로부터 7개월도 안 된 시기에 소집된 정치국 회의(2012.7.15.)에서 리영호를 ‘신병관계를 이유’로 총참모장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돌연 해임하였다. 해임 이유에 대해서는 ‘장성택과의 충돌설’ 등 여러 가지 설(說)이 있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다만, ‘리영호 해임’이라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 동일 일자에 김정은이 리설주(신분 미공개)와 함께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평양 경상유치원을 현지 지도했으며, 10일 뒤인 7월 25일에는 보란 듯이 공개적으로 리설주를 대동하고 능라인민유원지 준공식에 참석했다는 점에서, 리설주의 공개 활동을 반대하거나 제한하려는 리영호를 ‘로열패밀리에 대한 간섭’이라는 「괘씸죄」를 걸어 제거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추정해 본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떻든 공식서열 5위이자 군부 최고 실세의 한 사람이던 리영호가 권력을 물려받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20대의 ‘애송이’ 지도자에게 ‘악’소리 한마디 못하고 쫓겨났다는 것은 김정은의 지위가 –외부에서 민주주의 잣대를 가지고 관찰한 이상으로- 집권 초기부터 대단히 튼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김정은은 점진적으로 위상을 높여 나간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지도자’로 등장한 순간부터 선대 지도자들과 동일한 권한과 권위를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김정은의 능력이라기보다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부자 세습되면서 확립된 ‘지도자’의 지위가 그만큼 확고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리영호 해임으로 자신의 권위를 과시한 김정은은 이후 빈번한 군부 인사를 단행했다. 군의 3대 요직에 대한 인사를 김정일과 비교해 보면, 김정일은 집권 20년 동안 인민무력부장(현 국방상) 3회, 총참모장 3회, 총정치국장 2회에 교체한 데 비해, 김정은은 각각 8회, 7회, 4회에 이른다.

인민무력부장 총참모장 총정치국장


오진우(76~95)
최 광(95~97)
김일철(97~09)
김영춘(09~12)
최 광( ~95)
김영춘(95~07)
김격식(07~10)
리영호(10~12)
오진우(67~95)
조명록(95~10)
최룡해(10~14)


김영춘(09~12)
김정각(12)
김격식(12~13)
장정남(13~14)
현영철(14~15)
박영식(15~18)
노광철(18~19)
김정관(19~21)
리영길(21~현)
※ 20.10 국방상으로 변경
리영호(10~12)
현영철(12~13)
김격식(13)
리영길(13~16)
리명수(16~18)
리영길(18~19)
박정천(19~21)
림광일(21~현)
최룡해(10~14)
황병서(14~18)
김정각(18)
김수길(18~21)
권영진(21~현) 

이른바 ‘군부 길들이기’를 통해 군신(君臣) 관계를 명확히 한 것이다. 김정은과 군부의 관계는 당시 ‘2인자’로 평가됐던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제4차 포병대회(2015.12)에 참석한 김정은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잘 보여주고 있다. 영상을 보면 황병서는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을 하는 등 비굴한 모습 그 자체였다. 또 김정은을 수행하다가 자신이 김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참가차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방한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비록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국가수반 직위)이 손녀뻘에 불과한 김여정에게 깍듯하게 자리를 양보하는 장면도 ‘2인자는 있을 수 없다’라는 북한 체제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집권 2년여 만에 고모부인 장성택을 ‘양봉음위(陽奉陰違)’라는 죄명을 걸어 잔혹하게 처형(2013.12)한 것은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가 숙부인 비간(比干)을 죽인 일화를 연상하게 한다.

주지육림(酒池肉林) 고사의 주인공인 주왕은 달기라는 여인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간언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가 하면 포락지형(炮烙之刑)을 제정하여 숱한 사람을 처형하는 등 그야말로 희대의 폭군이었다. 주왕의 폭정을 보다 못한 비간은 “규범을 무시하고 아녀자의 말만 들으시니 재앙이 올 것입니다”라고 간언을 하였다. 짜증이 난 주왕은 “듣자 하니 성인의 심장엔 7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던데 한 번 확인 좀 해보자”라며 그 자리에서 비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뽑아 죽였다.

김정은도 자신의 통치 방식에 간섭을 했든, 아니면 그야말로 충간(忠諫)을 했든, 집안 어른인 장성택의 행동에 의혹을 품거나 부담을 느껴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말총으로 검을 묶어 천장에 매달아 놓았던 디오니시오스 왕의 심정이었을 게다. 그리고 내친김에 자객을 보내 이복형 김정남을 독살(2017.2)함으로써 자신에게 도전 세력이 될 수 있는 싹을 잘라버렸다.

북한은 헌법 서문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시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사실상의 왕조 체제나 다름없다. 김정은 10주기에 즈음해서 중앙추모대회(12.17) 등 관련 행사를 통해 김정일의 업적을 부각하는 한편 ‘선대의 유훈’을 잇고 있는 김정은에 충성을 촉구하는 선전 활동을 벌인 것 또한 ‘왕이 선조에게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고 공표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조선왕조 시대의 종묘대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국왕」을 내세울 수는 없기 때문에, 총서기니, 국무위원장이니, 최고사령관이니 하는 직위로 대체하고 있을 뿐이다.

왕조 국가에서는 나이나 경륜에 상관없이 왕좌에 앉는 순간 왕이라는 지위에 걸맞는 권한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주어진 권한을 어떻게 발휘하느냐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이렇게 볼 때, 김정은은 지도자 자리를 물려받은 순간부터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탄탄한 지위를 갖고 있었으며, 집권 10년 동안 이런 지위를 십분 발휘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이 구축해놓은 준(準) 왕조 체제인 ‘1인 통치체제’를 더욱 강화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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