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남·북한 유엔 가입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데 이어, 같은 해 9월 17일(한국시간 9월 18일) 유엔 총회는 남·북한의 유엔 가입 결의안을 표결 없이 통과시켰다.
북한은 그동안 ‘남조선 혁명’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남북관계를 민족 내부 문제로 규정하면서 외세의 간섭을 배제해 왔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유엔 가입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반도 분단 영구화 획책’이라고 강변하면서 한국의 단독 가입은 물론 동시 가입도 반대해왔다. 그런데 김일성은 왜 종전의 태도를 바꾸고 유엔 동시 가입을 결정했는가? 그 이유를 살펴본다.
■ 유엔 동시 가입 경과
광복 이후 이념 갈등으로 단일 국가를 구성하지 못한 남북한은 1948년 각각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했는데, 유엔은 제3차 총회(1948년 12월 12일)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라는 결의안을 통과 시켰다. 찬성 41, 반대 6, 기권 1이라는 압도적 지지였다. 이 같은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은 6·25 때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도 했다.
국제사회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은 한국은 1949년 1월 19일 유엔 가입신청서를 제출했고, 안전보장이사회 표결 결과 찬성 9표, 반대 2표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통과되지 못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유엔 총회에 한국 가입안이 상정됐지만, 소련 등의 비토로 번번이 좌절됐다.
한국의 유엔 단독 가입 추진 정책은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전(前) 대통령의 ‘평화통일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6·23선언」)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7·4 남북공동성명(1972년) 등 남북 간 화해 분위기 속에서 발표된 「6·23선언」에는 남북한의 상호 내정 불간섭, 북한과 수교한 나라에도 문호를 개방한다는 내용과 함께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박 대통령이 「6·23선언」을 채택한 것은 세계적인 데탕트 물결 속에 유엔에서 비동맹국가들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등 달라진 국제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한국의 유엔 가입 노력에 대해 “반통일 책동”이라고 반대했으며, 특히 ‘유엔 동시 가입’ 제안에 대해서는 ‘한반도 분단을 영구화하는 획책’이라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이른바 「김일성의 조국통일 5대 강령」에 포함된 ‘단독 유엔가입 반대 및 고려연방공화국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 가입’이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1985년 고르바초프가 공산 진영 종주국인 소련의 지도자로 등장하여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탈냉전(脫冷戰)이라는 변화의 시대로 들어가자, 남북의 유엔 가입 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한국의 유엔 가입에서 최대 장애물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소련과 중국의 거부권 행사였다. 그러나 한·소 수교(1990.9)에 이어 한·중 무역대표부 교환(1991.1)으로 이러한 걸림돌이 자연스럽게 제거되었다. 특히 고르바초프가 제주도 한·소 정상회담(1991.4)에서 ‘유엔보편성 원칙에 대한 이해를 표시’하자 상황이 일변했다.
북한은 한소정상회담 한 달여 뒤인 1991년 5월 27일, 외무성 성명으로 ‘남측을 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구실을 붙여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결정을 공표한다. 당시 성명의 일부를 옮겨 본다.
“남조선 당국자들이 기어이 유엔에 단독으로 가입하겠다고 하는 조건에서 이것을 그대로 방임해 둔다면 유엔 무대에서 전 조선 민족의 이익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들이 편견적으로 논의될 수 있고, 그로부터 엄중한 후과가 초래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결코 수수방관할 수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남조선당국자들에 의하여 조성된 이러한 일시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조치로서 유엔에 가입하는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어 북한은 외무성 발표가 있은 지 얼마 뒤인 1991년 7월 8일 북한의 유엔 대표부 대표인 박길연을 통해 유엔 가입신청서를 제출(한국도 같은 해 8월 5일 가입신청서 제출)했다. 그리하여 유엔 안보리의 결의안 채택과 유엔 총회의 표결에 따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실현된 것이다.
■ 유엔 동시 가입 : 김일성의 생존 전략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과 동구 국가들의 민주화 열기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북방외교를 전개했으며, 이런 노력은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의 ’88서울올림픽 대거 참가라는 결실을 맺었다. 더불어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소련과 수교를 하는 등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이었던 나라들이 잇따라 한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상황에 북한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김일성 따라 하기’를 하던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 처형(1989.12.25.), 동독이 서독에 흡수된 독일 통일(1990.10.3.)은 –김일성의 입장에서- 모골이 송연한 사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그리고 그 후손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존속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 전략을 필사적으로 모색했고, 1991년은 그 생존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 분주하게 보낸 한 해였다.
첫 번째가 김일성의 1991년 신년사이다. 김일성은 당시 신년사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제도, 두 개의 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방식’, 이른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제안하였다. 이 방안은 통일국가를 수립하되, 두 개 정부의 권한을 인정하고 제도적 통일은 후대(後代)에게 맡기자는 점에서 좀 더 현실성을 고려한 방안이었다. 이 방안에 따르면 유엔가입문제에서도 하나의 통일국가가 아닌 하나의 의석을 가진 남북 동시 가입을 수용함으로써, 슬그머니 남북 유엔 동시 가입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두 번째가 다름 아닌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다. 냉전체제가 유지되는 시기동안, 북한은 육속(陸續)한 소련과 중국의 든든한 지원을 배후로 해서 한국을 위협하고 미국에 대해서도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하지만 냉전 질서가 해체되면서 중·소로부터 종전과 같은 지원을 받기가 어렵게 되자 대남혁명은커녕 흡수통일에 의한 정권의 생존 자체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의 유엔 가입 노력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990년에 제45차 유엔 총회에서는 71개국이 한국의 유엔 가입에 적극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북한의 단일 의석 가입안에는 아무도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이처럼 국제사회의 여론이 한국에 완전히 기울자, 김일성은 ‘국제사회의 보호를 받기 위한’ 생존 전략 차원에서 마지못해 유엔 동시 가입을 받아들인 것이다.
끝으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에 힘입어서 남북은 1991년 12월 서울에서 5차 고위급회담을 열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이어 남북은 1992년 2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도 채택했는데, 북한은 그들의 대남 적화전략에 눈엣가시나 다름 없었던 팀스피리트 훈련의 중단과 전술핵 철수라는 망외의 소득까지 얻었다.
세균은 환경이 열악해지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포자(胞子)를 만들어 잠복기에 들어간다. 김일성도 생존을 위해 ‘낮은 단계 연방제 제안’, ‘유엔 동시 가입’이라는 포자를 형성했는데, 이런 생존 전략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 1991년의 반성적 복기(復棋)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적대적 대립 관계를 완화하고 한반도 평화 정착과 남북한 평화공존, 통일 여건 조성 등에 중대한 전기를 제공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이후의 사태 진전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비핵화 공동선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금지조약(NPT)에서 탈퇴(1993.3.12.)한 데 이어 국제사회의 우려와 제재에도 불구하고 핵과 미사일 개발을 강행하여 헌법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할 정도로 강력한 핵·미사일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1991년을 전후한 시기는 국제적 환경이나 경제난 등 당시 북한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할 때 평화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도 이런 기회를 놓친 채 ‘게임 체인저’로 불리는 북핵에 대해서도 우유부단하게 대처함으로써, 이제는 김정은의 의지에 따라 대한민국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는 처지가 됐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다음 두 가지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대북 정책을 너무 안일하게 수립하고 추진한 것이다. 사실 북방외교의 성공은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이라는 ‘시쳇말(時體-)’이 있듯이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 편승해서 거둔 성과일 뿐인데, 필사적으로 체제생존을 모색하는 김일성 정권에 이런 방식을 답습했다. ‘선작오십가자필패(先作五十家者必敗 : 먼저 오십 집을 짓는 사람은 반드시 진다)’라는 바둑 격언이 있다. 형세가 크게 유리하면 마음이 느슨해져 바둑에 지기 쉽다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이런 경계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에서는 ‘북한이 조만간 붕괴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고 정부도 이런 전제하에 대북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했다.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열풍처럼 휩쓸었던 독일 통일 연구이다.
둘째, 김씨 정권의 특성을 간과한 채 민족 공존 등 감상적인 감성으로 대북 접근을 한 것이다. 하지만 감상적인 접근을 하게 되면 ‘북한 주민’과 ‘북한 정권’의 구분에 혼선을 가져오는 등 매우 심각한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런 현상은 포용적 대북 정책을 추진하는 진보정권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진보 인사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족 공조’와 ‘남북공동 번영’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이번 정부 들어서만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공동제안국에 3번이나 불참하는 등 북한 주민의 인권 상황을 외면하는 자가당착(自家撞着)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결국 진보정권이 주장하는 ‘민족 공조’는 2,500만 명에 달하는 북한 주민(민족)이 아니라 김정은(권력)과의 공조를 뜻하며, ‘공동 번영’ 또한 북한 주민의 복지 향상이 아니라 김정은 체제의 연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욱이 선택적이고 지엽말단적인 협력 방식으로는 공동 번영은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다. 사실 남북이 공동 번영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안은 김정은이 결단을 내려 북한을 전면 개방하면 된다. 하지만 민생을 강조하면서도 ‘자력갱생’을 강조하는 김정은의 행태로 볼 때, 전면 개방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고 하겠다.
지난 1991년의 우(愚)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의 자세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먼저, ‘보여주기식의 이벤트’나 ‘대화를 위한 대화’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일찍이 노자(老子)는 “그릇의 쓰임새는 비어 있는 공간에 있다”라고 설파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의 대북 대화 정책을 보면, 비핵화 실현은 어느 사이에 뒷전으로 밀리고 오로지 ‘북한 바라기’의 모양새만 남았다. 이래서는 비핵화는 요원해지고 오히려 북한의 핵 능력만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둘째, 일관된 대북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대북 정책이 실패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정권 교체 시마다 대북 정책도 전면 수정된다는 데 있다. 한 마디로 연속성이 없이 Semper Initium (항상 시작일 뿐)이다. 북한도 이를 십분 활용하여 대남 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이 같은 취약점을 극복하고 대북 정책을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국민적 합의를 거쳐 헌법적 가치’를 지닌 대북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대단히 긴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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