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에 北 임금인상 고집, 결국 공장 문닫아

▲ 평양 순평완구공장에서 만들어진 인형견본. 수만개의 완제품들이 결국 북한의 임금인상 요구 때문에 남한 회사가 망한 1년 뒤에 인청항에 도착했다. ⓒ데일리NK

추운 날도 맨발로 일하는 여성 공원들 생각에 평양 공장에 갈 때마다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양말이나 목도리, 스카프, 신발 같은 생활용품들을 몽땅 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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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품들이 서울보다 중국이 훨씬 값 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것이 남한 제품이라는 것을 알 날이 있겠다 싶어 남대문에서 물건을 사갔다. 그렇게 해야 필자의 마음도 흐뭇해졌다.

남한에서 사가는 물건들은 모두 상표를 완전히 제거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반입자체가 불가다. 시장에서 잔뜩 사온 물건을 집에 가져와 밤새 포장과 상표를 뜯어 버리고 나면 영 볼품이 없었다.

누군가가 신다가 넘긴 중고품 같은 느낌이 났다. 그래도 받는 사람들 기분을 생각해서 보기 좋게 골고루 종류별로 분류해 다시 투명 비닐 지퍼팩에 넣어 포장한다. 그래야 받는 사람도 좋고, 선물하는 필자도 보람이 크기 때문이다. 선물을 주고 난 후에 기뻐하는 공원들을 보는 필자의 즐거움은 어느 것과도 비교하기 어렵다.

공장을 새로 짓는 과정에 북한 측의 시멘트와 철강재가 약속보다는 많이 늦어졌다. 이런 일은 북측 사정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존 공장에서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일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건설자재가 생각보다 공급이 너무 늦어져서 건설은 거의 제자리 걸음이었다.

공장이 이전되는 장소와 전력사정을 볼 겸 다시 평양에 들어 갔다. 평양발전소에서 가까운 거리에 건설대학과 건설자재 제조 공장이 함께 있다. 이곳 구역 내 건물 하나를 수리해 옮기기로 한 것이다. 이 공장은 현역 여자군인이 교대로 정문 보초를 서는 좀 특별한 곳이다.

정문 바리게이드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방문객이 드나들 적마다 신분증 검사며 경비가 심하다. 차 속에 내가 앉아 있으면 힐끗 쳐다보고는 바리케이드를 비켜준다. 표정이 전혀 없다. 인사도 없다. 필자를 아니꼽게 보는 느낌이다. 남조선 사람이 사장 행세하면서 다니는 모습을 좋지 않게 볼 수도 있을 법하다.

공장 이전하면 공원들은 따라오지 못해

어떻게든 시일이 걸려 공장 내부 공사가 완성됐다. 김명선 사장은 전에 있던 공장에서 횡광등과 전기 줄까지 웬만한 것은 전부 걷어왔다. 그래야 이사 갈 공장에 전기시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전소 앞이라 전기는 특선으로 설비하여 정전걱정은 전혀 없다고 했다. 전기가 항상 걱정인데 잘 됐다고 생각했다.

공장일꾼들은 반장격인 10여명 정도 외에는 새로운 공장으로 옮겨 올 수가 없다고 한다. 이 10여명은 특별히 공장 부근 아파트로 이사를 시켜주는데 살던 곳은 평양 외곽지역이고 이사 오는 곳은 평양 한복판이라 특혜를 받게 된 것이다.

나머지 일꾼들은 살고 있는 곳과 공장이 멀기 때문에 정부정책상 숙련된 일꾼들이라 해도 공장을 따라 갈 수는 없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공원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켜야 한다.

다행히 바느질공장에 다니는 사람이 많은 동네이기 때문에 사람 구하는 데는 별 어려움 없이 해결된다고 한다. 옮기고 손 발 맞추는데 숙련되기까지 두 달이 걸려 다시 안정된 생산 공장 분위기로 돌아왔다. 이제는 새 공장을 건설하여 옮기기 전에는 절대로 이사할 생각 말고 차분히 좋은 생산품 만드는 데만 주력해 달라고 부탁했다.

귀국하여 새로운 디자인 봉제완구 5종류 2십 만개 분의 원, 부자재를 인천에서 선적하여 남포항으로 보냈는데, 북한 세관 창고에 보관하여놓고 한 달이 되도록 공장으로 못 가지고 갔다는 연락이 왔다. 이유는 운반할 트럭을 빌릴 수가 없어서 계속 세관 창고에 보관 중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짐작이 갔다. 트럭을 하루 속히 사 달라는 일종의 공갈 데모 같은 것이다. 어차피 한달 안에는 그 원, 부자재를 사용할 것이 아니기에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뒀다.

남조선 사장 말 듣는다며 공장에서 쫓아내

이후 공장에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자체적으로 천을 운반했다. 일감을 미끼로 트럭 한대 어떻게 해 보려다가 당한 셈이다. 속 들여다보이는 짓이다.

이제는 솜씨도 믿을 만큼 됐고, 또 속도도 다소 빨라져서 매월 15만개 정도는 수월하게 선적이 가능하게 되어 차츰 안정된 사업으로 자리가 잡혀갔다. 이대로만 한다면 매월 5천 개씩 생산량을 올려 금년 내로 최소한 이십 만개 정도는 편안하게 수입할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것도 복(?)이라고 한국에 IMF라는 불행이 닥쳐오면서 주문량이 반토막이 났다. 투자가 없는 데다가 임가공료를 50~100%를 올려달라는 통첩이 왔다. 임가공료 때문에 평양에 갔다.

김명선 사장이 경질되었다. 나와는 말 한마디 의논 없이 무슨 속셈인지 사장을 갈아치운 거다. 도대체 이런 경우도 있느냐고 항의했지만 그동안 일을 잘해 완구공장보다 더 좋은 직장으로 승진하여 갔다고 말할 뿐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내원이나 다른 사람에게 알아 봐도 김사장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만나게 해 달래도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다.

IMF 시기에 임가공료 인상 요구해와

그런데 어느 날 보통강 호텔 1층 가게에서 안내원 등 몇몇 사람들과 맥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4층 방으로 가는데 어떤 남자가 복도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명선 사장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임가공료를 올리지도 못하고 사장선생 시키는 것만 한다고 쫓겨났는데, 앞으로 공장 건설이고 뭐고 잘 안 될거랍니다. 트럭도 사 주지 말고, 임가공료를 안 올려도 충분합니다. 그러니까 잘 알아서 처리하시라는 말을 전하러 했습니다.”

김명선 사장을 만나게 해 달라는 말도 하기 전에 이 사람은 자기 말만 전하고 바쁜 걸음으로 또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가 버렸다. 김명선 사장이 호텔로 필자를 만나러 올 수 없다는 것도 필자는 잘 안다.

만일 나를 만나러 오려면 안내원과 의논하여 허락 하에 나에게 와야 하는데 이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란 것도 명선 사장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자기도 애가 탈것이다.

설령 나를 만나도 안내원이 항상 옆에 따라다니기 때문에 왜 회사를 그만 두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못할 것이다. 이렇게 행동이 부자유스럽게 살고 있다는 것을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이 말을 누가 믿으려고 할까?

이미 당에서 결정해 그 지시에 의해 올려달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올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만 시간이 필요했다. 중국 상품의 세계시장 진출실정을 그대로 알려주고, 한국의 어려움을 털어놓으면서 경제가 좀 좋아질 때까지 임가공료 올리는 문제를 보류하자고 했다. 그리고 생산량도 중국처럼 오르면 그때 가서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자고 말했다.

아무리 말을 해도 타협이 안돼 일단 만든 제품은 계획대로 선적하여 납기에 차질이 없도록 해 달라 부탁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중국측은 임금을 낮추어서라도 공장을 계속 돌리자고 하여 회사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명색이 동족이 한국의 어려운 사정을 알면서도 양보해 주지 않아 거래선이 떨어져 나가고 주문량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임가공료 인상 안 해준다며 완제품 소송 거부

이미 만들어놓은 십만 개의 곰, 오리, 당나귀들은 임가공료를 올려 주지 않는다고 선적도 하지 않고, 남포에 보낸 이십 만개 분의 원, 부자재도 임가공료를 올려 준다는 약속을 하지 않은 한 공장으로 보내줄 수 없다고 했다.

즉시 평양으로 달려갔다. 민경련 회장과 광명성 총사장을 만나 실정을 이야기하고 만들어 놓은 제품을 저렇게 안 보내주면 유통회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거래선이 완전히 떨어지면 사업은 하지 못한다며 통사정을 했다.

임가공료를 올리는 것과 일감 다시 보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선적하는 것도 시급하니 하루 속히 선적부터 하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곧 챙겨서 선적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런데 한 달이 돼도 선적을 하지 않고 원, 부자재부터 보내라고 똑 같은 말만 계속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평양으로 갔다. 새로온 공장 사장이 보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평양 가서 만나면 보내준다 말하고, 귀국하고 나면 보내지 않았다. 화가 치밀었다. 십만개의 임가공료를 송금하면 돈만 떼어먹고 또 딴소리할까봐 현금을 홍콩에서 만들어 직접 들고 평양으로 갔다.

광명성총회사에서 책임지고 선적하라고 맡기고 왔다. 결국 만들어 놓은 제품이 인천항에 도착하기까지는 일년 반이란 세월이 걸려 왔다. 이때는 이미 국내 수입회사는 자금난으로 부도나고 퇴출당했다.

인형의 아름다운 꿈이 좀 더 크지도 못하고 노력한 숨 가쁜 세월도 보람 없이 공장 문을 닫아야만 했다. 참으로 허무하고 괘씸하고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다른 민족보다도 훨씬 못한 비극 서러운 북한의 본성 그대로였다.

그렇게 활발하게 출발한 그 공장을 무슨 사유로 그렇게 허무하게 문을 닫아야만 했는지 영영 이해 못한 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김찬구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필자약력> -경남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졸업, -LA 동국로얄 한의과대학졸업, 미국침구한의사, 중국 국제침구의사. 원양어선 선장 -1976년 미국 이민, 재미교포 선장 1호 -(주) 엘칸토 북한담당 고문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평양 광명성 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졸업-북한학 석사. -세계화랑검도 총연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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