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盧 정부, 북한을 너무 좋게 대했다”

▲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SAIS 겸임교수 ⓒ 연합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은 한·미관계사의 역사적 증인이다. 이 때문에 한국사람들에게는 항상 궁금증의 대상이었다.

데이비드 스트라우브(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SAIS 겸임교수)전 한국과장은 1976년 하버드대 정치학 박사과정 재학중 국무부에 들어간 뒤 10·26부터 지난해까지 격동의 한·미관계를 직접 목격하며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다듬어온 인물이다. 올 봄학기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강의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기에 앞서 지난 주말 워싱턴의 SAIS 연구실에서 그를 만나 4시간 동안 지난 4반세기의 한·미관계 이면을 들어보았다.

― 79년 10·26 이후 전두환 정권이 탄생할 때까지 미국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미국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전두환·노태우 세력이 한국군을 동원하면서 생긴 안보상의 공백으로 인해 북한의 도발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일이었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27년밖에 안되는 시점이었다. 미국의 최우선 관심사는 북한의 오판을 막는 것이었다. 한국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미국 대사와 미국 정부가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 대사는 아주 정직하고 선비같은(scholary) 사람으로 내가 존경하는 외교관이다. 대사직을 떠난 뒤 그는 79, 80년 상황을 돌이켜보며 수년간 연구를 했다. 한국사람들은 미국의 역할을 엄청나게 크게 생각하는데 왜 미국은 전두환을 저지할 수 없었는가. 그가 쓴 책의 제목이 ‘엄청난 연루 의혹, 보잘것없는 영향력(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이었다. 미국의 처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당시 전두환은 (검열과 보도지침을 통해) 언론을 조작하며 미국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했다. 하지만 글라이스틴 대사는 신문사 고위간부들과 직접 만나고 친서도 보내면서 전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 하지만 80년 당시 미국의 역할을 놓고 한국내에 논란이 있는데….

“대사나 당시 존 위컴 미군사령관 모두 12·12와 군부의 재등장, 권력 장악을 심각히 우려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전두환을 매우 싫어했고 사실은 경멸했다. 나중에 미 육군 참모총장이 된 위컴 사령관은 12·12 당시 전두환 등이 전방에서 군대를 빼돌리는 것에 대해 크게 화가 났다. 이른바 ‘한국인의 들쥐 근성’으로 알려진 위컴 발언의 본뜻은 전두환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전두환이 권력을 잡자 곧바로 줄을 서는 한국의 고위직들에 대해 배신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특히 위컴은 당시 들쥐가 아니라 레밍(lemming)이라는 표현을 썼다(다람쥐와 비슷하게 생긴 레밍은 무작정 남의 뒤를 따라가는 특성이 있다). 더욱이 당시는 이란의 혁명수비대가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장악하고 미국인들을 인질로 잡고 있던 시점이었다. 미 행정부의 관심은 온통 이란 대사관 인질사태에 쏠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카터 행정부는 한국군에 대한 무기 판매 중단 같은 제재를 취하고 군사협력을 중지하면서 전두환 군부에 압력을 가했었다.”

― 81년부터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전두환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미국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호하기보다는 군사독재를 지지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레이건이 집권했을 당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매우 크게 생각했다. 그는 한국에 비록 문제가 많을지언정 공산주의 북한보다는 훨씬 우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레이건도 인권을 도외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전두환에게 대통령 단임 이후 물러나도록 독려했다. 박정희식 종신독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의 주관심사는 김대중의 구명이었다. 한국정부가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전두환을 외국지도자중 가장 우선적으로 초청해주었다. 나중에 글라이스틴 대사는 당시 전두환은 이미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않기로 결정하고서도 대미 협상용으로 김대중을 이용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었다.”

― 국무부에서 지켜본 한·미정상회담 등의 실상은 어땠나.

“조지 W 부시-노무현 대통령의 정상회담 분위기는 정중했다. 두 정상은 서로 다른 대북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깊고 솔직한 대화는 피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한국이 이라크 파병을 해준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정중하게 대했다. 노 대통령도 한국내 보수세력의 비판때문에 정상회담이 실패한 것처럼 비치는 것을 피하려고 했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특히 지난 임기때 김대중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이 언론에 나쁘게 비쳤던 것을 보고 부담스러워했다. 한·미관계가 나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 한·미 정상은 서로 ‘실패’라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최근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변하면서 양국 정상은 이제 보다 수월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다.”

― 부시 대통령의 최근 대북정책은 과연 얼마만큼 변한 것인가.

“엄청나게 변했으며 개인적으로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부시 대통령은 2001년 취임과 함께 빌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모두 무시했다. 그런데 지난 2·13합의는 사실상 클린턴 행정부 당시 제네바 합의의 의미를 다시 받아들인 것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부시 대통령과 바로 대북정책을 논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6자회담은 앞으로 잘될 것 같은가.

“협상이 난관에 부닥쳤을 때도 부시 대통령이 과연 지금의 정책을 계속 추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려가 있다. 또한 북한 지도자들이 핵을 포기할 것인지도 아직은 의문이다. 그들은 남한과의 경쟁, 미국·중국·일본의 위협을 의식해서 핵무기를 개발해왔다. 북한이 시간을 벌기 위해 초기 합의를 했을 수 있지만 6자회담 자체는 긍정적이다. 앞으로는 북한이 시간을 지연시킬 경우 미국은 중국과 한국의 보다 충분한 협력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 지금 한국 야당의 대선후보는 당선되면 전시작전통제권 문제를 재논의하겠다고 하는데 가능한 일인가.

“적어도 한·미군사동맹 재편을 둘러싼 도널드 럼즈펠드 장관의 판단은 옳은 것이었다. 한국의 재래식 전력과 대북 억지력에 대한 한·미간의 판단도 일치했다. 한·미연합사는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미동맹의 전반적인 관계다.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은 럼즈펠드 장관보다는 동맹을 더 배려하는 성격이다. 그런 차원에서 일정 등에 관해 부분적인 조정을 할 것이다. 하지만 전시작전통제권은 한국측으로 넘어갈 것으로 본다. 시기는 아마도 2009~2012년중 마지막 연도로 조정되지 않을까 싶다.”

― 지난 76년 국무부에 들어온 뒤 독일과 한국 등 분단국 외교 경험을 쌓아왔는데 남북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두가지다. 하나는 분단이고, 또하나는 남북이 라이벌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정부는 최근 북한을 너무 좋게 대해왔다. 하지만 북한은 이에 대해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을 비난하는 쪽으로 화살을 돌려왔다. 특히 김대중 정부는 남북한 화해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overselling)했다. 문제는 북한이다. 북한이 진지하게 한국과 협력했다면 부시 행정부도 절대로 대북 강경정책을 펴지 못했을 것이다.”

―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어느쪽에서 제안한 것인가.

“노 대통령의 이니셔티브였다. FTA가 한·미관계와 한국(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노 대통령이 판단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유지하려는 기본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 역사를 돌이켜 보면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에서 한국의 국익을 팽개쳐왔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도 자신의 국익 판단에 따라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을 너무 좋게 생각하거나 너무 믿지는 마라. 하지만 미국을 너무 미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신들의 국익이 어디에 있는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 국무부 일본과장으로서 미·일관계도 다뤘는데 한·미관계와 비교해보면.

“미국은 10여년전 일본과 치열한 무역전쟁을 했다. 그때 미·일관계는 정말 최악이었다. 미·일 양국 정부 당국자간 대화도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이 세계 최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인 다수는 일본이 속임수의 명수여서 최고가 될 것이라고 봤고, 소수의 미국인들은 일본인들이 진짜 실력으로 세계 최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예측은 완전히 틀렸었다. 불행하게도 미국은 이런 판단착오를 반성하지 않았고, 일본과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는 기회를 잃었다. 이런 종류의 국가적 집단사고는 반드시 미국에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내 경험을 돌이켜보면 많은 한국인들의 미국관에서도 이런 비슷한 현상이 때때로 보였다.”

인터뷰=최형두 워싱턴 특파원 /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