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김일성 현지지도 아파트에 난입한 군인들

김일성 사망으로 북한의 분위기가 엄숙해져 있던 1994년 여름 함경북도 청진에서 겪은 일이다.

필자는 당시 인민군 제6군단 사령부가 있던 청진시 라남구역에 출장을 갔었다. 가는 길에 옛 부대 선후배들을 불러 역전 앞 장마당에 쭈그려 앉아 농태기(개인들이 만든 술) 한잔 마시면서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선후배들은 이미 제대해 민간인 복장이고 필자도 역전마다 꼭 보게 되는 경무원(헌병) 애들이 귀찮아서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물론 상의만 와이셔츠 차림이고 하의는 군복바지에 반짝거리게 광을 낸 워커(한국군 군화)를 신었다. 짧은 상고머리에는 중국산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우리가 한창 술을 마시며 수작을 털고 있을 때였다. 주변을 오가는 꼰삼이(군인-남한 말로 군바리) 서너 명이 흘끔흘끔 유독 나만 쳐다보며 지나갔다. 계급장을 보니 군관학교(사관학교) 생도들이었다. 그 생도들이 보고 있는 것은 필자가 신고 있는 워커였는데 점차 우리가 앉아 있는 주변에 똑같은 계급장의 녀석들이 많아지고 개중에는 우리 일행 쪽을 손가락질 하며 뭔가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일행 중 한 명이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다며 장소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자기집으로 가서 다시 잘 마셔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곧 역전 앞 무궤도전차(두 개의 기차칸을 연결해 전기를 공급받아 움직이는 전차)정류장에 갔다. 당시만 해도 그런대로 전기 공급돼 전차가 잘 움직일 때였다. 전차는 만원이었다.

일행 중 전차 운전기사였던 기철이가 자신의 동료에게 신호하자 버스 앞문을 통해 우리는 특별한 사람인양 으스대며 올랐다. 그런데 기철이가 나를 툭 치며 “아까 그 꼰삼이들이 버스 뒤에 탔는데 계속해서 너만 쳐다 보는 게 수상하다”고 말해줬다. 그래 봤자 죄지은 것도 없는데,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남한 군화를 노리는 사관생도들

두 정거장 지나 남청진이라는 곳에 버스가 서게 되고 우리 일행은 그곳에서 내렸다. 건널목이 아닌데도 지나는 자동차도 없고 해서 그냥 무단횡단을 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어이”하고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라는 소리에 기분이 나빠 뒤돌아 보니 아까 시장에서부터 본 군관학교 생도들이 나를 가리키며 손짓한다. 대략 7명 정도가 돼 보인다. 나이로 보나 짬밥(군생활 경력)으로 보나 필자가 고참이어도 한참 고참이다. 저들에게는 상관이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필자가 돌아서서 멀뚱하게 쳐다보니 대뜸 조교 같은 스타일의 학생분대장계급의 녀석이 “형님아, 군대가 좀 보자는데 이리 온나”라고 말했다. 말투를 보니 그냥 봐도 오합지졸들이다.

그 녀석들이 필자를 보자고 한 이유는 워커가 탐이 나서였다. 필자가 신고 있는 워커를 보고 어디 경보병이나 정찰대에서 굴러먹다 제대한 놈팽이로 보고 힘으로 뺏으려는 것이었다.

필자가 녀석들 사이로 걸어가자 우리 일행 4명은 뒤쪽에 우두커니 서서 곧 벌어질 좋은 구경거리를 미리 상상해 흐뭇해했다. 친구들은 최소한 현역시절 나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은 친구들이라 별로 걱정하지도 않는다.

버스정류장의 많은 시민들도 군관학교 생도들과 그사이에 키가 껑충하고 수상한 옷차림의 필자를 불안한 눈길로 바라본다. 몸이 다부지고 광대뼈가 우뚝한 생도분대장녀석이 대뜸 “신발 좀 바꾸어 신자”하고 반말이다.

여섯명을 일시에 제압하다

“내가 왜 당신들에게 내 신발을 줘야 하는데?”하고 일부러 어수룩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뒤에 서있던 다른 녀석이 손으로 뒤통수를 툭 치더니 돌아보는 나에게서 선글라스도 슬며시 벗긴다. 그리고는 자신이 선글라스를 쓰고는 으쓱해 하면서 “너 그 신발 적군장비 맞지? 우리가 강제로 빼앗을 수도 있으니 좋게 말할 때 그냥 벗어라”라고 위협하는 것이다.

벗으라고 해서 벗어줄 내가 아니다. 술도 한잔 마신데다 손도 근질거리겠다, 필자는 속으로 “오늘 제대로 걸렸다”고 속으로 기를 다졌다. 가뜩이나 후방에서 안일하게 지내는 녀석들이라 비딱하게 보이는데다가 지금 하는 행실을 보니 전방에서 군생활 하던 필자는 녀석들이 도저히 군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도 있고 하니 녀석들은 “일단 우리하고 조금 가자”하면서 나를 주변의 강가로 끌고 가려고 했다. 나의 소매를 당기고 뒤에서 등을 밀치는데 안 가려고 버티자 그나마 빌려 입은 와이셔츠 소매가 ‘북’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순간 필자는 생도 분대장녀석의 면상을 오른발로 그냥 돌려차기 했다. 녀석은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아스팔트바닥에 그대로 “쿵”하고 쓰러졌다. 그다음 옆에서 선글라스 빼앗아끼고 어깨에 힘주고 있는 녀석을 손끝으로 목 기도를 타격했다.

그때 갑자기 눈앞에서 별이 번쩍하더니 나의 이마로 붉은 피가 쭉 흘러내렸다. 한 녀석이 손에 돌돌 말아 감고 있던 혁대로 내정수리를 내리쳤는데 군용버클이 머리에 직접 맞은 것이다.

재차 내려치는 혁대를 받아 쥐고 확 당기니 녀석은 필자 앞으로 왔는데 피가 흐르는 이마로 녀석의 면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망신, 신장의 차이 때문에도 그렇지만 그 녀석이 본능적으로 머리를 움츠리면서 나의 박치기는 빗나가고 말았다.

그런 녀석을 일단 넘어뜨리고 깔고 앉아 퍽퍽 소리 나게 얼굴을 타격했는데 다른 녀석 두 명이 뒤에서 나를 발로차고 때리고 난리다. 그래도 아픈 것도 모르고 그냥 깔고 앉은 녀석부터 확실하게 패버렸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한 녀석의 허리춤을 잡고 이번엔 이마를 정 조준해서 그대로 면상을 받아넘겼다. 그 녀석도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넘어갔다. 상황이 이쯤 되자 나머지 3명은 그냥 부리나케 달아나 버렸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군대가 죽었다”고 수군거리며 웅성웅성하는데 그때 친구들이 “야, 빨리 이곳을 피해야 한다”고 귀띔해 우리일행은 도로를 가로질러 주변에 있던 친구녀석의 집으로 들어갔다.

김일성 현지지도 아파트도 난입하려는 군인들

친구녀석의 집은 김일성이 생전에 청진에 시찰 나왔을 때 들어가 본 15층짜리 ‘현지지도 아파트’로 간부급들과 어느 정도 돈깨나 있는 재일교포(귀국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 친구네 집에서 머리에 난 상처를 치료하고 저녁 무렵 우리는 친구 어머니와 누나가 차려준 푸짐한 저녁상을 마주앉았다.

이때 갑자기 아파트 전체가 소란스럽더니 밖에 나갔다 온 친구 엄마가 공포에 질려 들어왔다. “야, 너희들 절대 밖에 나가면 안 된다. 지금 아파트 밑에 수백 명의 군대들이 쫙 깔려 너희를 찾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파트 밖을 내려다보니 정말로 최소한 4백 명은 족히 될 군관학교 생도들이 손에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고 있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아파트 주민(인민반 반장, 등)들 몇 명과 현지 분주소(파출소) 안전원(경찰)들이 길길이 날뛰는 생도들을 상대로 “이 아파트는 수령님이 현지지도하신 모범 아파트고 당신들이 찾는 사람은 없다”고 안간힘을 쓰며 진입을 막고 있었다. 보아하니 녀석들은 우리가 이 아파트에 들어간걸 분명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도망친 녀석들이 학교에 달려가 사연을 말하자 주말 외출하고 남은 생도들이 총동원돼 달려 나왔던 것이다. 거기다 싸움을 구경하던 주민들 중에 친구의 얼굴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생도들에게 우리의 행방을 알려준 것이다. 워낙 친구도 그쪽에서 싸움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밤 12시가 되가는데도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거기다 밖에 나갔던 친구누나가 올라와서 하는 말이 “철이야, 네 이름이며 우리집 호수까지 다 알더라. 그리고 군관학교 군관(장교)들도 왔는데 학생들에게 학교망신, 군대망신 다 시켰다고 욕을 해대며 지금 복수한다고 더더욱 날뛰고 있다”며 기겁을 했다.

“지금 라남구역 안전부까지 동원돼 왔는데 이제 좀 있으면 우리집에 올라올 것 같다”고 말하자 온 집안이 공포에 빠졌다.

일단 다른 친구들은 싸움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으니 걱정 없는데, 내가 집안에 있어 친구의 집까지 피해를 볼까 싶어 모두 걱정하는 눈빛이다. 나만 집에서 떠나주면 친구집에도 해가 되지 않을 상 싶어 친구에게 “필자는 돌아가겠다. 그냥 안전원과 군관들이 집에 오더라도 이미 나는 집에 오지 않았고 현재의 소속부대는 모른다고만 해라”하고 작별인사를 하고는 어두운 계단으로 4층까지 내려왔다.

밑에서는 아직도 수백 명의 군인들의 고함소리가 났다. 온 시내 주변아파트 주민들까지 덩달아 창문을 열고 생전 처음 보는 군대의 광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또 구역 안전부에서 온 수십 명의 안전원들이 군관학교 지휘관들과 뭔가 토론하는 모습도 보였다.

필자는 계단 복도의 창문을 열고 배수관을 타고 조용히 내려왔다. 모두가 건물입구쪽에 몰려가 있고 도로변 쪽에는 군인들이 없는 틈을 노린 것이다. 필자는 일단 땅에 내려온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장에서 약 4km를 뛰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청진을 떠났다.

이후 시간이 지나 다시 그 친구들을 만날 수가 있었는데 그들의 말에 따르면 내가 현장을 떠난 뒤 인민반장, 안전원, 부상당한 군인, 그리고 여러 명의 군관들이 친구네 집에 올라왔다고 한다. 그들은 내가 있나 없나 집안을 샅샅이 확인 해보고 돌아갔는데 이후 몇 일 동안 계속해 사복을 입은 생도들이 아파트 주변에서 친구의 집을 감시했다는 것이다.

또 안전부와 보위부에서까지 친구와 집식구들을 번갈아 호출하여 필자에대해 물어보는데 하나와 같이 함구했다는 것이다. 그냥 우연히 역전에서 만나 술 한잔 마시고 근처에서 싸움이 났고 이후 헤어졌을 뿐이라고.

그날 철 없는 망아지처럼 날뛰던 생도분대장 녀석과 다른 한 녀석은 여타 이유로 군복무 불가 판정을 받아 제대했다고 한다. 이들은 군사대학인 ‘두만강대학’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이후 청진에만 가게 되면 혹시나 날 알아보고 뒤통수에 돌멩이라도 날아오지 않을까 싶어 괜히 주변을 두리 번 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또 수많은 압력 속에서 꿋꿋하게 필자를 지켜준 친구와 그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그때 김일성 사후 얼마 안 된 시기라 애도 기간에 인민군대를 폭행했다며 시범케이스로 총살형도 당했을 뻔한 일이고 또 잡히기만 했다면 최소한 병신이 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지금 생각해도 가슴을 쓸어 내린다.

그리고 필자 때문에 군복무 도중 제대해야 했을 그 사관생도 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필자도 그들도 젊은 혈기를 주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양이 되었더라면 피해갈 수가 있었던 일이기도 했었는데, 되돌아 보면 참 반성하고 미안한 일들이 많다.

이정연/북한군 정찰부대 출신(98년 입국), ‘북한군에는 건빵이 없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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