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김일성 애도기간, 온 나라가 멈춰섰다

▲ 김일성 동상 앞에 길게 늘어선 추모 행렬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7월8일은 김일성이 사망한 날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북한주민들은 이날이 올 적마다 11년 전 그때처럼 만수대 동상에 헌화하고, 김일성을 참배한다. 김일성은 죽었지만 아직 살아있는 신처럼 북한주민들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난 세월 북한 주민의 머릿속에 뿌리 깊이 내렸던 우상화선전 때문이다.

언제나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여주기 위해 김정일은 주석궁을 ‘금수산 기념궁전’으로 개건했다. 그 안에서 김일성은 아직도 산 모습 그대로 누워있다.

동양의 효(孝)와 ‘유훈’을 접목시켜 건설한 이 거대한 궁전에만도 매해 천문학적인 외화가 탕진되고 있다. 이로써 김정일은 11년이 되는 오늘까지 죽은 아버지의 후광을 받으며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

김일성 사망은 불행의 서곡

1994년 7월 9일 정오 12시. 중앙TV방송과 유선방송은 10시부터 30분 간격으로 중대 보도를 알리는 예고편을 연발했다. 북한에서 중대방송은 일년 중 새해 신년사 발표외에 별로 선포되지 않는다.

‘혹 8월 김영삼대통령과 만난다더니, 남북관계에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가’하는 예측도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부대에도 강당에 TV를 설치한다, 정복차림을 갖춘다,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정각 12시. 스튜디오가 아닌 청색 배경의 엄숙한 세트에서 중앙TV 앵커 전형규의 침울하고 갈린 음성이 들려왔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선노동당 중앙 군사위원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전체 당원들과 근로자들, 조선인민군 장병들, 조선인민경비대, 온 나라 노동계급과 협동농민들, 남조선과 해외에서 조국통일을 위해 싸우고 있는 애국자들, 해외동포들에게 우리당과 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위대한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음을 가장 심심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엄숙히 알린다”

순간 장내는 물을 뿌린 듯 조용했고, 이윽고 여기저기서 ‘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앵커의 음성은 계속되었지만,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바로 이날을 기해 북한주민들은 영생하리라고 믿고 따르던 ‘김일성교’의 교주와 이별했다.

김일성의 사망 시간은 7월8일 새벽 2시다. 사망속식이 최초 발표된 시간은 7월 9일 오전 12시. 발표까지 34시간이 걸렸다.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원인을 밝히고, 사망 소식을 주민들에게 발표할지, 말지에 대한 논란에 34시간이 걸린 셈이다.

김일성의 사망은 김일성 통치의 끝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이날을 기해 김정일은 ‘유훈통치’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통치술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국상(國喪)에 떠는 주민들

김일성의 영구차가 평양시를 배회하고, 영결하는 주민들이 오열하는 모습은 남한 TV에도 방영되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 CNN, 영국의 BBC방송은 ‘어느 나라의 백성이 지도자와의 영결을 이처럼 슬프게 진행한적이 있는가’라고 영결식장에서 오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내보냈다.

애도기간은 초기 8일부터 17일까지 정했다. 이후 19일까지 연장되었다. 이 기간 주민들은 매일과 같이 만수대 언덕에 있는 김일성의 동상에 헌화하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적은 사람들은 눈물을 쥐어짜야지 눈물이 없으면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몰리기가 십상이었다.

처음 북한 주민들은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눈물은 태어날 때부터 우상화 교육에 젖어 수령의 대리 삶을 살았던 주민들이 흘리는 정신‘불구자’의 눈물이었다. 거짓은 아니었지만 불구의 눈물이었던 셈이다.

각 기관마다 빈소를 차렸다. 빈소를 차린 방의 김일성 초상화는 검은 띠를 둘러 반쯤 내려 추모상 앞에 걸었다. 김정일의 초상화는 따로 떼어 보관했다.

아침저녁으로 온 부대가 한시도 비우지 않고 호상 근무를 섰다. 19일 중앙영결식이 진행될 때까지 오직 김일성의 장례를 위해 만전을 기했다. 온 나라는 장례 때문에 모든 가동을 멈췄다.

제일 먼저 경계태세에 돌입한 것은 안전, 보위기관들이다. 이들은 관내에서 벌어지는 반정부적 움직임을 제때에 진압할 수 있도록 무기에 실탄을 장전하고 다녔다.

주민들은 꼭 생화를 헌화해야 했다. 조화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산과 들에 꽃을 꺾다 모자라 큰 ‘연구실화단’의 꽃을 습격해 경비를 서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꽃 때문에 주민들의 고통이 다시 시작됐다.

그 당시만도 김일성 장례식 이후 수 백만 주민들의 장례식이 이어질 것으로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곧 이은 ‘유훈통치’에 의해 95~97년까지의 기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는 大국상이 발생했다.

관혼상제 금지령, 금주령 내려져

‘애도기간’ 중 온 나라에 금주령이 내려졌다. 이 기간에 술을 마신 사람들은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몰려 가차없이 숙청당했다. 조상전례대로 내려오는 장례 관습에 따라 주민들은 음식을 차려 김일성의 초상 앞에 놓고 절 하고 한잔씩 나눈 사람들도 있었다.

역으로 이것을 문제 삼는 ‘충성분자’들은 맹활약 했다. 호상 감시 속에 사는 주민들은 ‘아무개는 충성심이 없이 애도기간에 술 마셨다’고 신고하여 애매한 사람들을 출당, 철직시켰다.

비료문제 때문에 평남도 안주 남흥화학공장에 내려갔던 평양시 농촌경리위원회 부위원장도 차례상을 차리고 소주 한잔 한 것이 죄가 되어 철직 된 사례도 이때의 일이다.

김일성의 손에서 자란 최고인민회의 의원이었던 00군 경영위원장 장성옥도 음주건에 걸려 ‘배은망덕한 놈’으로 몰려 산골로 추방되었다.

‘애도기간’ 결혼식, 환갑식, 심지어 조상제사도 금지되었다. ‘애도기간’에 죽은 사람들은 친척들의 곡성 한번 들어보지 못하고 다음날로 한적한 산야로 실려갔다. 결혼날짜를 잡았던 사람들은 이로부터 3년이 지난 ‘애도기간’이 끝날 때까지 미루었고, 환갑날을 받았던 늙은이들도 뒤로 미루고 쓸쓸하게 보내야 했다.

‘애도기간’은 그야말로 평화시기의 계엄령과 같은 것이었다.

이날도 명암은 갈려

김일성의 사망에 전체 인민들이 다 슬픔에 잠긴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 사망소식에 가장 놀라고 기뻐한 것은 과거 북한체제에서 탄압받은 사람들이었다. 과거 지주, 자본가 등 자산계급출신들과 치안대 연고자들, 정치범들은 탄광이나 광산에 추방되어 고역에 시달렸다. 부모가 세상을 떴어도 연좌제로 그의 자식들은 갖은 박해와 멸시를 받아왔다.

교화소나 정치범 수용소에는 죄수들의 반항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사전에 시설을 봉쇄하고 외부의 정보가 들어가지 못하게 알리지 않았다.

김일성의 사망소식에 ‘이젠 우리도 사람답게 살게 됐다’며 심장마비에 걸려 죽은 늙은 할머니도 있었다. 술을 마시고 덩실덩실 춤까지 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항상 감시하던 보위부는 이들을 ‘애도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어디론가 끌고가 숙청해버렸다.

황정하(가명, 2001년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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