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 사라진 北 ‘디스코 막춤’ 부활조짐

▲90년 초 야외에서 춤을 추는 北 젊은이들

북한에서 발행되고 있는 예술잡지 ‘조선예술’이 최근 북한 내부에 유입되고 있는 소위 ‘날라리 춤을 비롯한 퇴폐적인 무용의 침습을 철저히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 눈길을 끈다.

잡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0년 11월에 발표한 ‘무용예술론’을 소개하면서 “반동적인 무용예술 조류의 침습을 막는 것은 사회주의적 무용예술을 건전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중요한 방도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이같은 주장은 북한사회 특성상 모든 출판물이 김일성-김정일 체제의 선전도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중국을 경유해서 들어오고 있는 서양 문물들 중 특히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춤이나 음악의 유입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에서 서양식 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 구(舊) 소련과 동구권의 개혁 개방에 의한 서방 문화가 유입되면서 시작됐다. 해외에 나가있던 북한 유학생들이 90년을 전후해 대거 귀국하면서 ‘디스코 춤’ 열풍이 불었다.

특히 디스코 춤은 89년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전후해 북한의 대도시들에서 10~20대 초반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북한의 십대 청소년들은 디스코 춤을 모방해 북한 판 ‘막춤’을 만들어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들은 김일성 생일과 명절날, 대도시 공원에 기타와 녹음기를 들고 나와 수십에서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술을 마시며 흥이 나면 함께 어울려 ‘디스코 막춤’을 추며 놀았다.

당시 군대에 입대하는 17세 초모생(군입영자)들의 환송연에서 조차 ‘디스코 막춤’은 등장했다. 학교 친구들과 가족, 친지들이 어울려 기차역 광장에 모여 녹음기를 틀어놓고 밤새도록 춤을 추며 함께 어울렸다.

놀라운 것은 이때 한국 노래까지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 당시 자주 듣고 불렀던 노래가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을 비롯해 남진의 ‘님과 함께’‘마음이 고와야지’ 등이다. 당시 북한 젊은이들이 ‘막춤’을 출 때 흥을 돋우는 인기곡들 이었다. 그때는 이런 노래가 한국 노래라고 생각지 못하고 다만 북한의 대남방송에 사용되는 음악쯤으로 알고 있었다.

이렇게 북한에서도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음악을 듣고 춤을 출수가 있었다. 그러나 89년 중국에서 천안문사태가 발생하고, 같은 해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세스쿠 정권이 민중봉기에 의해 붕괴돼 사형에 처해진 이후, 위기의식을 느낀 북한 정권이 자유주의의 침습을 적극 단속하고 나섰다.

이와 함께 90대 중반엔 식량난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으며 주민들에겐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춤을 출 기력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후 대량 탈북사태가 발생하고, 중국과의 무역이 성행하면서 외부세계의 정보가 내부로 침투하기 시작하자 춤바람이 다시 불고 있다. 북한 당국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주민들을 상대로 교양을 강화하는 등 백방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최근 북한의 젊은이들은 당국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한국의 뮤직비디오를 즐겨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과 국경지대 청소년들도 여기에 동참하고, 끼리끼리 몰려 다니면서 포르노를 보는 것이 취미일 정도다.

평양 고위층 자제들은 한 친구가 생일을 맞으면 식당을 통째로 빌려 생일파티를 하고 밤새 춤을 추며 논다고 한다. 평양 교외지역에서도 젊은이들이 저녁에 춤판을 벌이면 규찰대가 이를 단속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김정일 정권이 체제유지를 위해 외부세계의 정보를 아무리 통제하려 해도 인간 본연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억누르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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