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평양축전 후 북한경제 급속 내리막”

▲평양축전 후 휴전선으로 입국한 임수경(경향)

임수경은 북한에 입국할 때 회색 짧은 소매티에 벨트 없이 색 바랜 청바지 차림이었다. 도착 30분 후 호텔 2층 접견실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가졌다. 당시 필자의 감회가 남달라 기자회견장을 떠올리며 그때 기억을 정리해본다.

필자는 미국서 온 ‘동포 기자’라고 둘러대고 회견장에 입장했다. 가지회견을 비디오로 촬영하면서, 임수경에게 예민한 질문도 쏟아냈다.

(당시 필자가 촬영한 비디오 녹화분을 수정 없이 옮겨본다)

필자가 먼저 물었다. “외신에 의하면 남한 당국에서 전대협의 북한 방문이나 해외여행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는 소식이었는데, 어떻게 공항을 이용하여 출국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어디 어디를 경유하여 누구의 도움으로 평양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는지요?”

임수경이 씩씩하게 답했다. “남한 정부가 그렇게 물샐틈 없이 출국저지를 했다고 했지만 출국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고요. 일본 동경에 와서 며칠 동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결심 하고 떠난 길 용감하게 떠나자’ 하고 동베를린을 경유해서 비행기로 오늘 도착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이어 조선중앙방송 차례가 됐다. “국가보안법과 관련하여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여기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당연히 국가보안법에 해당됩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은 해괴한 법이거든요. 제가 여기에 온 데 대한 법적인 문제는 첫째, 적지로의 탈출. 둘째, 여러분들을 만났기 때문에 이적단체 만남. 여기서 노동신문을 봤기 때문에 유인물 판독 죄.

다시 남한으로 돌아가면 외지(적지)에서 잠입 죄(여기에서 기자들의 웃음이 일제히 터졌다). 저는 돌아가면 당연히 구속됩니다. 조국은 하나지만 제가 태어난 곳이 대한민국이고, 저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저는 축전이 끝나고 나면 부모님 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녀의 연설과도 같은 대답이 이어졌다. “우리는 평양 가더라도 정치적인 행사에는 참가하지 않겠다. 그래서도 이 축전에 참가하는 것을 막기 때문에 통일원 장관도 그 정도면 참가해도 괜찮겠다고 했고, 그러나 정부와 민정당과 노태우는 반대를 했고, 반대를 한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반(反)통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요.

우리는 북한을 진짜 바로 알고 역사적인 7∙4공동성명에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 강령을 항상 기본으로 염두에 두고 사상과 이념과 제도는 다르지만 이것을 초월해서 남과 북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녀는 “조국은 하나다!”는 구호를 외쳤다.

누군가 질문을 했다. 남쪽 학생들의 통일 염원에 대해서 말해 달라고 했다.

“전대협 학생들은 그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드러 누워 판문점에서 남-북 학생들이 만나 통일에 대한 토론을 하자고 매일 같이 외쳤지만 노태우 정부는8,000여명이나 되는 많은 학생들을 검거하였고, 연세대학교에 약 2만 여명이 모였는데 대량 검거만 없었더라면 더 많은 학생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부와 열심히 싸워, 평양은 어떻게 싸우고 있나?”

이어 “남-북 학생들이 뜨거운 통일 염원으로 만난다면 반드시 통일은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생략). 우리는 정부와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평양학생들은 어떻게 싸우는지는 모르겠지만 남-북한 학생들을 합친다면 자주적 평화 통일은 이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임수경을 환영하는 인파들이 길을 막고 얼마나 손을 잡았던지 손목과 손등에 상처가 심하게 났다. 그녀는 환영군중들 틈에서 겨우 빠져 나와 붕대를 감은 손을 마음껏 휘저었다.

임수경은 남한에서 이 말은 곧 용공이고 검거 대상인데, 북쪽의 인민들은 이렇게 많이 모여 열광 아닌 광적으로 외치면서 환영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느낀 듯했다.

“이렇게 북쪽 동포들이 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은 줄은 정말 몰랐다. 한국민들은 전부 통일을 원하고 있는데 원하지 않는 것은 현 정부와 미군일 것이다. 지금 노태우 정권은 통일이란 말만 해도 미친듯이 발광을 합니다”라고 말했다.

회견 처음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힘주어 말할 때 그래도 한국대학생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똑똑한 여학생이구나! 하는 칭찬하고 싶은 감동을 간직했는데 노태우 일당이니 뭐니 할 때 나는 크게 실망했다.

“평양의 해는 임수경으로 뜨고, 임수경으로 졌다”

이어 조총련계 기자가 일본으로 돌아가서 총련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싸인 요구에 따라 ‘조선은 하나다’란 글을 남겼다.

임수경은 전대협 진군가를 부르면서 회견을 끝났다.

임수경이 통일 방안에 대해서 북측 학생들과 합의해 공동발표를 하면, 곧 통일이 될 것처럼 분위기가 고조됐다.

임수경은 수십만 군중 앞에서도 서툴지 않고 남한 대학생의 당당함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평양의 해는 온통 임수경이라는 남한 학생의 화제로 뜨고 졌다.

이후 평양중앙 TV에 일주일 동안 계속 인터뷰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나의 모습이 크게 그리고 세밀히 방영되어 호텔이고 상점이고 식당이고, 그들은 내가 미국서 온 신문기자로 한동안 알고 있었고 인사 받기도 바빴다.

‘89년 7월1일 5∙1경기장은 오후 3시부터 일반 관객들이 입장을 하고 임수경은 혼자 전대협 깃발을 흔들면서 15만 명의 우뢰와 같은 함성과 박수를 받으며 입장했다. 주석단 앞에서는 잠시 김일성에게 인사하고 보무도 당당하게 운동장을 돌았다. 마치 이번 행사의 주연은 임수경인 것처럼 흥분된 분위기였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88올림픽은 북한이 청년학생축전을 자극했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을 더 가난 속으로 빠지게 한 것이다. 이 학생 축전을 치르고 북한은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이날 새로운 거리 광복거리에는 일본 니가타항에서 출항한 만경봉호에 갖가지 물품을 싣고 평양에 도착했다. 조총련 수백명이 포장마차 식으로 갖가지 음식 장마당을 차려 장사를 하고, 광복거리 주변에 신축한 아파트에는 지구 저 반대쪽에서 온 색깔 짙은 사람들을 수용했다. 평양은 밤새도록 먹고 춤추며 살판나게 날을 지새웠다.

<필자약력> -경남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졸업, -LA 동국로얄 한의과대학졸업,미국침구한의사, 중국 국제침구의사. 원양어선 선장 -1976년 미국 이민, 재미교포 선장 1호 -(주) 엘칸토 북한담당 고문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평양 광명성 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졸업-북한학 석사. -세계화랑검도 총연맹 상임고문.-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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