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군입대는 내인생의 기쁨…그러나 성분 앞에서

필자가 한국에 입국한 해가 1995년이니까 벌써 이곳에 정착한지도 십 년이 넘게 흘렀다. 서른여덟을 먹기까지 북한에 살았던 내게 남한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여기서 쓰는 말로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같은 게 하나도 없었고, 비슷해 보여도 모든 것이 조금씩 달랐다. 북한에서는 모든 것을 똑같이 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라도 같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다름과 개성을 추구하는 것 같았다. 입는 옷도 하나같이 다른지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신기할 정도였다.

남한의 뉴스를 보면서 북한과 다른 점을 많이 느꼈다. 그 중에서도 참 필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뉴스가 병역기피 뉴스였다.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를 가기 싫어 별의별 수단을 다 쓰는데 돈 있는 집안일수록 군대에 가는 비중이 낮다는 뉴스도 나왔다. 군대를 안 가기 위해 권력과 인맥을 이용하고, 실제로 있지도 않은 질병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종교적인 이유로 병역 거부 선언을 한 뒤 군대 대신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봤다. 무슨 ‘증인’들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속사정은 잘 모르겠다.

그 모두가 필자가 북한에서 군에 입대할 때는 상상조차하기 힘든 일이었다. 필자는 1977년 군대에 입대했다. 그 당시 북한에서는 군대에 못 가는 경우는 있어도 안 가거나 피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 때만 해도 군입대는 당연한 일이자 소원이었다.

물론 지금 북한 젊은이들이 군대에 안 가려고 하는 풍조가 많이 생겼다고 들었다. 요새 북한 주민들도 군대를 불신하고 있다. 식량난을 겪으면서 주민들의 식량을 훔치고 재산을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군대도 먹고 살려니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요새는 군인 지나가면 “개가 지나간다”는 비아냥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누차 말했듯이 필자가 군복무를 하던 7-80년대는 인민군대는 영예의 대상이었다. 군복무는 입당의 전제 조건이었고, 입당은 출세의 전제조건이었다. 먹는 것도 사회보다 훨씬 괜찮았다. 쌀밥과 돼지고기 배급이 제 때 정량으로 이뤄졌다.

군대에 가지 못하거나 입당을 하지 못한 사람은 미래를 보장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농장이나 공장에서 단순 노역을 해야 했다.

친구 중의 한 명이 군대에 가지 못했는데, 이유는 아버지가 국군 포로였기 때문이었다. 그 집안은 아들만 7형제인데 막내를 빼고는 모두가 군대에 갈 수 없었다.

막내만이 ‘당의 배려’로 군대에 갈 수 있었다. 김정일이 인민들을 회유하려는 정책이다. 나중에 큰 사변이 나면 김정일을 향해 총부리를 드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이다. 한 사람이라도 정권의 녹을 먹으면 반란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가장 기뻤던 일은 77년 군입대였다. 10년 뒤 제대하고 나서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내 주변에 친구들은 군대에 못 간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런 애들은 모두 장애가 있거나 나쁜 ‘성분’을 가진 애들이었다. 그런 애들과의 비교 의식 때문에 어쩌면 더 기뻤을지도 모른다. 철없던 시절이었다.

10년 동안의 군 복무 생활은 그런대로 버틸 만 했다. 훈련 강도가 높아 힘든 날이 많았지만 젊은 날이었기에 웬만한 건 다 해냈다. 30kg이 넘는 무장을 하고 100리 행군을 해도 모두가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돼 있어 낙오자는 3,4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려움을 이겨 내기 위해 서로 도와가는 과정에서 전우애, 동지애는 강해져 갔고 나름대로 좋은 추억들도 쌓여져 갔다. 80년대에는 식량 사정도 괜찮았기에 훈련 때 배급도 잘나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급도 조금씩 올라갔다. 부하들을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상관이란 걸 해 볼 수 있었다. 출세란 게 어떤 건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군대에서조차 ‘성분’의 벽은 어쩔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을 복무해도 올라갈 수 있는 벽은 한계가 있었다. 군대에서 있었던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군인도 성분이 좋아야 상관

스물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열일곱에 입대했으니 제대하기 1년 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저 멀리서 처음 보는 소위가 나타나더니 나한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깜짝 놀라 바로 거수 경례를 했다.

“누굽네까?”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이상했다.

“저를 모릅네까?”

반말도 아니면서 존댓말도 아닌 듯한 말투였다.

자세히 보니 얼마 전까지 필자의 대원으로 있던 부하였다. 제대 직전 분대장으로 꽤 많은 대원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소위가 돼 있었다. 그 전에는 단지 부대를 옮긴 걸로만 알고 있었다.

“야 이 새끼 언제 갔다 왔나” 며 반갑게 등허리를 두드렸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상부에 의해 뽑혀서 군관학교에 다녀온 것이었다. 성분이 좋은 집안이어서 뽑혀갔다고 했다. 사령부에서는 그렇게 성분이 좋은 애들을 뽑아 군관학교에 보내 소위, 대위로 임명하고 있었다.

“너, 소위라고 해도 내 대원이었어, 알간?” “아 당연하죠, 분대장 동지” 비공개 석상이라 다행히 반말을 쓸 수 있었지만 어색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몇 년 동안 부대끼던 부하가 바로 내 소위로 부임해 왔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집안이 좋으면 소위도 거저 되는구나, 그저 이렇게 제대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소위가 된 그 부하는 필자를 편하게 대하려고 애쓰는 듯 했으나, 역시 불편한 심기는 감추지 못했다. 필자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필이면 직속 상관으로 배정됐을까 란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 후 공식석상에서는 “소대장 동지, 소대장 동지” 하면서 격식을 차리고 항상 조심해야 했다. 부하에게 대하던 버릇이 남아있어 말실수를 할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편하게 대하려고 했지만 공식석상에서 실수 할까 두려워 점차 존댓말을 쓰게 됐다. 결국에는 1대1일로 만나면 자리를 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군 생활은 성분이 만들어 놓은 씁쓸한 관계 속에서 마무리 됐다.

군에서 배운 건 오로지 ‘인내심’ 하나

10년째 되던 날, 드디어 제대를 하게 됐다. 그 때 역시 입대만큼은 아니더라도 기뻤던 것 같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돌아가야 될 사회가 두렵기도 했지만, 10년 만에 다시 얻는 자유가 너무 좋았다. 북한 자체에 자유가 없지만 그래도 군대보다는 나았다. 10년이나 있었던 군대였지만 아쉬움은 0.1%도 없었다.

10년 동안의 군생활은 참으로 길고 긴 시간이었다. 복무 시에는 길다는 생각도 못했지만, 어느새 세상은 다 변해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니 하나같이 머쓱한 얼굴들이었다. 입대 당시 7살이었던 막내 동생은 다 큰 처녀가 돼 있었고, 부모님은 벌써 늙어 계셨다.

막내 동생은 처음 집에 군화가 있는 걸 보고 “오마이 안전원 왔나?”면서 두려운 눈으로 날 쳐다 봤다. 어머니께서 큰 오빠라고 하자 어리둥절한 눈으로 날 쳐다 보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제대 후 입당을 했다. 그러나 그렇게 기대했던 출세는 요원했다.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북한 전체가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배치 받은 기업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배가 고팠다.

배고픔이 절정에 달한 97년도, 필자는 결국 고향 함흥을 떠나 회령에서 두만강을 넘었다. 중국에서 1년 반을 있다가, 미얀마로 입국, 2년 반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 이후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이제 북한 고향 땅을 떠난 지 10년이 됐다. 중국 감옥에서 살아 남은 것도, 한 달 동안 걸어 미얀마 국경을 넘은 것도 군대에서 배운 인내심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남한에 와서야 그 10년이 얼마나 아까웠는지 실감한다. 남한 청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도전할 기회도, 시간도 모두 가지고 있었다. 2년 조차 아까워하는 이유를 이젠 충분히 납득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시간을 뺏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꿈을 이룰 수 있는 사회인만큼 성분과 입대 여부에 출세가 달려있는 북한과 천지차이다.

남한 사람들은 군 입대를 축복으로 여기던 필자의 추억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북한에 있는 사람들도 이곳 젊은이들처럼 군대를 바라볼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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