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자주국방’서 시작한 국방개혁 약사

참여정부의 국방개혁입법(안)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역대 정부에서 시도됐던 국방개혁안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리 군의 개혁 역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도자의 개혁 마인드와 국민적 합의가 뒷받침되지 않아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참여정부들어 일찌감치 국방개혁안을 마련해 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프랑스군의 입법과정을 거울삼아 개혁입법안이 마련되고 있는 것은 이런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국방부가 이번 정기국회에서 성안을 목표로 추진중인 개혁입법안에는 국방본부 문민화 및 획득제도 개선, 진급제도 개선, 징.모혼합형 병역제도, 예비군 축소(304만명→150만명) 등이 담길 전망이다.

특히 총병력 규모를 50만명으로 유지하고 육군 1.3군을 통합해 지상작전사령부를 창설하는 것을 비롯한 육.해.공군의 지휘계선 단축안이 법제화되면 역대 어느 정부에서 보다 고강도의 개혁작업이 이뤄질 것이란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1970년의 ’70위원회’와 1980년대 ’80위원회’, 1990년의 ’818계획’, 그리고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시도된 3단계 국방개혁작업 등이 등 군의 대표적인 개혁 사례로 꼽힌다.

1970년대에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미국의 군사원조 규모가 축소되고 주한미군 감축이 이뤄져 자주국방이 추진됐다. 북한의 군사력과 군사위협은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있었으나 군사력은 북한 군사력의 50% 정도로 대북억제력을 갖추기에는 턱없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2월 담화를 통해 ’스스로 돕고 스스로 일어서서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자조(自助).자립(自立).자위(自衛)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자주국방을 공식적으로 표방했다.

앞서 1973년 을지연습 때는 자주국방을 위한 군사전략을 수립하고 전력증강 계획을 발전시킬 것을 지시, 자주국방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1972년부터 1992년까지 강력히 추진됐던 율곡사업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국방개혁이 일부 빛을 보게된 것은 1990년 8월 ’818계획’이 마련되면서부터다. 이 계획에 의해 군 지휘체계 및 구조의 변화 작업이 추진됐다.

3군의 통합작전개념을 구현하기 위해 1990년 10월 1일 합동참모회의가 신설돼 군사력 소요 제기의 주체가 각 군에서 합참으로 이관됐다. 또 군 인력과 무기체계 발전추세를 고려한 신규문서 발간의 필요성이 대두해 ’국방중기부대계획서’, ’국방 중.장기획득개발계획서’가 작성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합참의 소요기획 능력이 현실적으로 한계에 봉착해 결국 1995년 4차 제도정비시 이 업무는 다시 각 군 본부로 환원되고 말았다.

합참의 공통직위는 육.해.공군이 각각 2대 1대 1의 정신으로 편성한다는 818계획의 원칙은 이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어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국방장관 직속으로 ’국방개혁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육군 1.3군사령부를 해체하고 지상작전사령부 창설을 계획했으나 안보 취약점 노출과 한.미 연합작전 지휘체계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점이 대두해 유보됐다.

1999년 육군수송사령부를 모체로 국군수송사령부가, 육군항공사단이 육군항공작전사령부로 각각 개편됐다. 그해 6월에는 육군 화생방방호사령부가 창설됐다.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국방대학원, 국방참모대학, 국방정신교육원을 국방대학교로 통합한 것도 이 때다.

그러나 역대정권에서 추진됐던 국방개혁 방안은 총병력 감축과 군 고위직 축소 등이 전혀 이뤄지지 않아 실질적인 개혁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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