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납북자 88% 전쟁 초반 3개월이내 납북”

북한이 전쟁초기인 1950년 7월~9월까지 약 3개월간 납북자의 88.2%에 해당하는 8만4천659명을 납북시킨 것은 전쟁 전부터 납북계획을 수립,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10일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전쟁납북자료원)이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주최한 ‘휴전체제의 전환과 전시 민간인 납북자’ 세미나에서 허만호 경북대 교수는 전국적인 납북자들의 피랍 시기를 조사한 결과 “한국전쟁 초기 약 3개월 동안에 전체 납북자의 88.2%가 납북됐다”며 이같이 밝혔다.

허 교수는 1950년 10월~12월은 2천299명, 1951년 이후는 3천172명이 피랍됐다”고 부연했다.

이어 “공산군이 진입한 초기에 납치되었고, 얼마간 시간이 경과한 뒤에 납치된 경우도 있으나 이는 숨어 지내다 뒤늦게 발각되거나 혹은 유인책에 이끌리어 나갔다가 납치된 것으로 보아서 납북계획이 미리 세워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 중 789명(0.82%)은 직장에서 상사가 출근명령을 내리게 해 출근하게 한 뒤에 납치했고, 심지어 친구를 동원해 유인한 뒤에 납치했다”며 북한의 납치행위는 체계적, 조직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부연했다.

허 교수의 분석자료는 전쟁납북자료원 측이 파악한 ‘서울특별시 피해자명부’, ‘6․25사변피납치자명부’, ‘6․25사변 피납인사 명부’, ‘실향사민등록자명단’, ‘6․25동란으로 인한 피납치자명부’ 상의 11만2천627명 중 중복 등록을 제외한 9만6천13명의 신상명세를 활용한 것이다.

전쟁 납북자를 지역별로 구분하면 충청도가 2만3천664명로 가장 많았고, 서울 2만2천348명, 경기도 1만8천270명, 강원도 1만1천375명, 전라도 1만853명, 경상도 9천503명이었다.

이에 대해 허 교수는 “당시 인구가 가장 많았을 경상도에서 납북자 수가 가장 적었던 것은 북의 점령기간이 가장 짧았고 점령지역이 제한되었기 때문이고 서울, 경기도, 충청도에서 가장 많았던 것은 북 점령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기 때문”이라며 “민간인 납북은 북한정부의 총체적인 전쟁정책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추론했다.

이어 전체 납북자들의 납치 장소로 구분했을 때 “자택에서 납치가 이루어진 경우가 72.1%, 자택 근처에서 납치된 경우가 8.2%로 도합 80.3%에 이른다”며 이는 “북한 정부가 피랍자들의 인적 사항을 사전에 파악하여 계획적으로 납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납북목적을 분석한 허 교수는 “피랍인들의 직업을 보면 납북목적을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며 “납북자 중 농민은 61%에 해당하는 5만8천373명으로 단일 직업으로는 가장 많지만 당시 농민이 전체 인구의 80%정도를 차지했던 것에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것”이라고 했고, 이들에 대한 납북목적은 “전시 노동력을 제공 받고자 납북해 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남한의 사회여건 상 전체 인구대비 전문 인력 비율이 높지 않았을 것임을 감안하면 대단히 많은 수에 해당하는 행정공무원 2천919명, 법조인 190명, 교수 111명, 교사 752명, 의사 368명, 약사 158명, 기술자 2,836명 등 다수의 전문인을 납북해 간 것은 북한의 소위 ‘국가건설’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사회단체 879명, 정당인 106명, 국회의원 63명의 납북은 (북한정권의) 정통성 확보와 통일전선에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