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마오쩌둥이 남한 무장봉기 강요”

1965년 중국 최고권력자 마오쩌둥(毛澤東)이 북한과 김일성에 대해 남한에서 무장 게릴라 봉기를 일으키라고 강요했음을 뒷받침하는 김일성의 1966년 발언록이 공개됐다.

김일성은 마오의 요구에 대해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선례를 들어 섣부른 무장봉기는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말했지만, 이런 발언은 그 직후 1968년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침투를 비롯한 남한에 대한 도발이 부쩍 많아진 역사적 사실을 해명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원로 한국전쟁사 연구자인 소진철(77) 전 원광대 교수는 일본의 사상운동연구소가 1978년 편찬한 ‘일본공산당 사전’이라는 책자에서 미야모토 겐지(宮本顕治) 서기장을 비롯한 일본공산당 대표단 8명이 평양을 방문한 1966년 3월11-21일 김일성에게서 직접 들은 내용을 정리한 문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소 전 교수는 관련 문건 일체를 최근 발간된 한국외교협회 기관지 ‘외교’ 제86호를 통해 공개했다.

이 대화록에 의하면 마오는 1965년 3월에 김일성에게 만나자고 요청했다. 이에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인 최용건을 중국으로 대신 보냈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당대표도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지역 혁명에 대해 논의”한 이 만남에서 마오는 최용건에게 “남조선 인민이 게릴라 투쟁을 시작하도록 (북한이) 지도해 주기 바란다”고 요구했다고 김일성은 발언했다.

하지만 이런 강요에 김일성은 “남조선에는 해안이 많고, 산이 벌거벗었으며, 교통이 비교적 발달해 있는 데다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서 대중 속에 ‘비공연(非公然) 조직’을 만들어 대중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소모일뿐, 승리는 어렵다”는 의견을 일본공산당 대표단에게 개진했다고 문서는 말했다.

나아가 김일성은 “이러한 마오의 지시에 따라 행동에 들어갔다가 실패한 것이 인도네시아의 (공산)당이다.…인도네시아에서는 30만명이나 되는 공산당원이 군에 체포되어 그 대부분이 살해됐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중국 일변도였고 자금 측면에서도 중국에 너무 의존했다”면서 “우리는 인도네시아의 전철을 다시 밟아서는 안 된다”고 일본공산당 대표단에게 강조했다.

한국전쟁사 전공인 성신여대 김영호 교수는 “1965-66년 무렵이면 북한과 소련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던 반면 중국과는 그만큼 밀착한 시기”라면서 “당시 제3 세계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무장 게릴라 폭동이 잇따랐으며, 한반도에서도 그 직후에 유독 남한에 대한 북한의 무력도발이 부쩍 늘어난 현상을 이 문건을 통해 해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 발언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한 달 전인 1950년 5월에 중국 만주의 선양(瀋陽)에서 북한과 중국, 소련의 3개국 당 대표가 회담을 개최했으며 “이 때 미군이 도발행위를 하면 즉시 반격을 해 남진(南進)할 것을 결의했”으며, 아울러 “이 때 중국은 직접 군대를 보내서 (북한을) 원조하고, 소련은 무기를 보내서 원조한다는 방침도 결정됐다”고 발언했다.

김영호 교수는 “한국전쟁 직전에 3개국 대표가 회담을 했다는 것은 처음 드러난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김일성은 일본공산당 대표단에게 “조선전쟁(한국전쟁)에서 이익을 본 것은 오직 소련 뿐”이며 “조선과 중국이 희생함으로써 (소련은) 극동지역에 만연한 미국 세력을 일시 저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덜레스 장관이 (남한을) 방문하는 등 미국측의 도발이 있긴 했지만 우리가 전쟁을 시작한 면도 있었”고, 나아가 “여기에는(한국전쟁을 벌이게 된 데는) 노동당 내부에 소련 일변도인 소련파와 중국 일변도인 연안파 간부들이 다수 있어 이들에 의한 압력으로 그렇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강력히 요구해 관철했다는 사실은 이제 의심할 바 없다”면서 “그럼에도 1966년 당시 김일성이 이런 식으로 전쟁 원인을 호도한 것은 당시 관계가 좋지 않던 소련, 그리고 자신과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인 연안파와 소련파에게 전쟁 책임을 덮어씌우려는 의도가 작동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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