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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이 1994년 미·북 제네바합의와 비슷한 합의문을 탄생시킬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은 (9·19)공동성명이 최종 이행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며, 공동성명은 제네바합의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최근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8일 베이징에서 열릴 예정인 6자회담을 앞두고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동안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 등으로 오랫동안 평행선을 달려오던 미국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질 만큼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다.
힐 차관보가 기준으로 삼은 ‘제네바합의’는 북한이 당시의 핵프로그램을 동결하고 이를 감시하기 위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는 대신 한국 등 국제사회가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고, 경수로가 완공되기 전까지 대체 에너지(중유)를 연간 50만t씩 제공한다는 것이다.
합의에 따라 미국이 북한에 연간 50만t씩 제공했던 중유는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시인 파문이 불거지자 다음 달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위반했다며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이사회 의결을 거쳐 대북 중유제공을 중단했다.
또 100만 kW급 경수로 원자로 2기를 북한 금호지구(신포)에 건설하기로 하고, 1997년 8월 착공했다. 그러나 북한이 HEU 핵개발에 나서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중단됐다가 2006년 5월 31일 공정 34.54% 상태에서 공식 종료됐다.
이런 가운데 일본 아사히신문은 4일 최근 북한을 다녀온 조엘 위트 전 미 국무부 북한 담당관의 말을 인용, “북한이 핵 폐기 초기 조치에 대한 대가로 경수로 제공 전까지 연간 50만t의 중유 또는 그에 상응하는 전력 제공과 테러지원국 지정 등 미국의 모든 대북 제재조치의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힐 차관보는 “중유 제공에 대해 북한과 논의한 적이 없다”면서도 “9·19 공동성명에 대북 에너지·경제 지원 관련 항목이 있다”고 밝혀 6자회담에서 대북 에너지 제공 문제에 대해 협의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8일 예정된 6자회담을 앞두고 북한은 금융제재 해제와 함께 에너지 지원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실제 북한이 6자회담에서 금융제재 해제와 에너지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북한은 에너지난을 타개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중소 규모의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는 ‘중소탄광 개발 및 운영 규정’을 채택했다. 이 규정은 기관·기업소·단체들이 필요한 석탄과 주민용 땔감을 해결하기 위해 중소규모의 탄광개발을 허용한 것. 북한의 심각한 에너지난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북한은 향후 6자회담이 진행되는 어느 시점에서 에너지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경수로 건설 재개와 중유 50만t 제공을 강하게 요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은 이를 위해 영변 핵 관련 시설을 동결하고 IAEA 사찰관의 복귀와 감시 카메라 재가동을 허용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초기 조치’ 이행에 따른 중유 제공 및 경제지원 대해 한미간 일정한 공감대도 형성되는 분위기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의 조치가 핵시설 동결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핵무기 및 핵프로그램 영구 폐기까지 이어질 것이냐는 여전히 큰 의문으로 남아있다. 게다가 북한은 IAEA 사찰관에 의한 원자로 조사나 핵연료봉 재처리 시설에 대한 접근은 인정하지 않고, 핵실험장 접근이나 폐쇄, 공표가 안 된 핵개발 계획 신고에는 응하지 않을 것임을 공공연히 내비치고 있다.
6자회담에서 경수로 제공 문제는 더 큰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한미 양국이 이번 6자회담에서 경수로나 전력을 지원하는 문제는 논의하지 않기로 한 것과는 달리 북한은 에너지 문제의 근본 해결을 위해 경수로 건설 재개를 강하게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이 중유 50만t 제공과 BDA 문제 등 미국의 대북제재 완화 조치를 조건으로 영변 핵시설 동결이라는 초기 조치 합의에 동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북한은 경수로 제공 문제를 계속 물고늘어질 것이다.
설령 약 34% 공정률로 중단된 경수로 사업이 재개되는 시나리오가 나온다 해도 이행을 위해서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북한으로서는 핵을 폐기하지 않고도 중유를 제공받으며 계속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만약 미국을 비롯한 관련국이 94년 제네바합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조급한 성과주의에 빠져 미봉책으로 마무리 한다면, 북핵폐기의 길은 더 멀어질 수 있다.
한국, 미국을 비롯한 6자회담 관련국들은 북핵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해체’(CVID)라는 목표에서 물러서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