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까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많은 귀국자들이 북한에서 죽었거든요. 돌아온 자로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한(恨)을 풀어드리기 위해 북송사업의 실태를 알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북한에서 누군가는 사랑하는 부모·가족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을 테니까요.”
북송 ‘재일조선인’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사진·74)씨. 탈북자의 일본 정착을 지원하는 비정부기구(NGO) ‘모두 모이자’의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북송사업(▶관련 기사 바로 가기 : “북송 재일조선인 인권침해 사례 면밀한 조사 필요”)의 전후 실태를 알리고 조사를 촉구하는 운동을 국내외에서 전개하고 있다.
북송사업의 문제점을 국제적으로 공론화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는, 북한 당국과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는 물론 일본 정부로부터도 눈엣가시가 된 지 오래다. 조용히 넘기고 싶은 북송사업의 직접적 관계자들에겐 이 사업이 ‘현재도 진행 중인 반(反)인도적 범죄’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에이코 씨가 달가울 리 만무하기 때문.
에이코 씨는 북송사업 실태 조사를 촉구하는 과정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전화를 종종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한밤중에 걸려오는 낯선 전화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북송사업 진상규명’에 남은 삶을 바치겠다는 사명을 꺾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에이코 씨는 1960년 4월 제15차 귀국선(토보르스크호(號))을 통해 북한으로 갔고, 43년이 흐른 2003년 3월 탈북했다. 당시 17세의 소녀였던 그가 혈혈단신으로 북송선에 오른 까닭은 ‘사회주의 북한을 알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배가 출항하기 전까지 에이코 씨는 조총련이 선전한 ‘사회주의 지상낙원 북한’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배가 출항하자 기대는 불안으로 바뀌었다. 배가 공해(公海)에 들어서자, 누군가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음식물을 다 버리라’는 지시를 했기 때문. 에이코 씨는 의아했다고 한다. 에이코 씨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불안감은 북한 청진항에 도착한 이후 바라본 풍경에서 절망으로 바뀌었다. 북송선 도착을 환영하러 나온 북한 주민들의 핏기 없는 얼굴과 차림새를 통해 의심은 확신이 됐다고 에이코 씨는 털어놨다. 북한이 ‘사회주의 지상낙원’이란 조총련의 선전은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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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도쿄에서 취재진과 만난 에이코 씨는 북송사업의 문제점과 향후 과제를 조목조목 지적하며, 한국 정부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했다.
그는 “북송사업을 진행되면서 어느 누구도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면서 “재일조선인들은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는 선전에 속아 북한행 배에 몸을 실었다. 이런 사실은 이후 일본 정부나 조총련도 파악했지만 북송 사업을 멈추지 않았다. 명백한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일본 변호사들과 10개월에 걸친 면밀한 조사·작업에 의해 작성된 인권구제 요청서를 지난해 일본변호사협회에 제출했다. 그는 이 요청서를 통해 북송사업에 직접 관여한 일본 정부, 북한 당국, 조총련, 일본 적십자, 북한 적십자, 국제 적십자 등에 북송사업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 북송선을 통해 들어간 사람과 일본 가족들의 자유왕래를 촉구했다.
에이코 씨는 “북송사업 문제는 인도적 영역의 문제이기 때문에 북한이 끝까지 모른 채 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유엔차원에서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해야 한다”면서 “북일 간의 자유왕래가 실현되면 폐쇄공간인 북한의 문을 열수 있는 중요한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에이코 씨는 다음날에도 니카타(新潟) 취재에 동행했다. 4월의 니카타를 방문하는 것은 56년만이라고 했다. 북송선에 오르기 위해 56년 전 교토에서 니카타행(行) 특급열차를 탔던 17세의 소녀가, 56년 만에 신칸센을 타고 ‘평생 잊지 못할 곳’ 니카타로 향한 것.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던 그가 당시 감정을 털어놨다. 북한에 도착한 후 무엇보다도 에이코 씨를 힘들게 했던 건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고 한다. 그 누구도 북송선을 탄다는 건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임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에이코 씨는 혹여 자신을 따라 가족이 북한으로 올까봐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유일한 수단은 ‘북한으로 절대 오지 마라’고 편지를 쓰는 것이었지만, 검열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꾀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서 “그 당시 10살도 안된 막내 동생의 이름을 쓰면서 ‘동생이 결혼하면 색시와 같이 만납시다’ ‘조국이 통일 될 때까지는 아무리 힘들어도 일본에서 버텨달라’는 말로 북한으로 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고 말했다.
드디어 도착한 니카타 항(港). 에이코 씨는 말없이 주변을 배회했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그는 아직까지도 출항하던 순간이 생생히 기억난다고 했다. 그땐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신없이 손을 흔들었었다.
그는 “배를 탔던 모두가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순간의 결정이 사람의 일생을 바꾼다. 참 어리석은 결정을 했다”고 소회했다.
에이코 씨는 북받치는 듯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면서 “남은 시간을 아직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귀국자들을 위해 쓰고 싶다”는 각오를 재차 다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