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왕자 씨의 피살 사건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방북했다 돌아온 현대아산 윤만준 사장은 “사건 발생시간인 새벽 4시55분에는 사람이라는 것을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했다”고 밝혔다.
윤 사장은 16일 서울 계동 현대빌딩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거리에 따라서 150m~200m 정도 되면 구체적으로 남녀 구분이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사고지점을 봐서는 사람이라는 것은 충분히 분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사람이 뛰는 것을 보고 ‘서라’고 정지명령을 했으니 식별은 가능했다고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이는 북한 초병이 최소한 민간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는 관측이 가능하다. 특히 박 씨의 경우 당시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남녀구분도 충분히 가능했으리라는 관측이다.
하지만 북측은 “관광객들은 항상 관광증을 휴대하고 다니는데 사망자에게서는 아무런 신분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며 “관광객인줄 알았다면 절대 발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수차례 언급했다”고 윤 사장은 전했다.
피격 당시 총격 횟수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이번에 북측은 “경고 사격을 한 차례 했으나 그렇게 해도 멈추지 않자 3발의 조준사격을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건 당시 현장을 목격한 대학생 이인복 씨는 “10초 간격으로 총성 2발이 울렸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여성 관광객 이 모 씨도 똑같이 증언했다. 이에 따라 북측이 주장하는 4발과 우리측 관광객들이 증언하는 2발 사이의 갭(gap)은 더 벌어진 꼴이 됐다.
이는 북측의 “공포탄을 쐈다”는 주장처럼 북한 초병에게 정상적으로 공포탄이 지급되는 상황에서 공포탄을 빼고 바로 실탄 사격을 한 게 사실로 밝혀질 경우 사살 의도가 명백히 들어나게 된다. 때문에 북한은 계속해서 공포탄 사격을 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북측은 박 씨가 평지처럼 다져진 해안가를 이용해 달렸고, 초병은 발이 빠지는 모래사장 위로 추격하다보니 초병과 사고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져 불가피하게 총격을 가했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상식으로 50대 중년 여성을 20대 젊은 초병이 쫓아가지 못했다는 주장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또한 남한 언론에서 북한 초병의 기본 화기인 AK-47내지 AK-58 소총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북측은 이번에 “실탄 세 발을 조준 사격해 사고자가 두 발을 맞았다”고 변명하고 나선 상황이다.
우리 정부가 “50대 중년 여성이 20분간 3.2km를 이동했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의혹을 제기한 부분에 대해서도 북측은 종전과 다른 해명을 내놨다.
일단 현대아산 측은 박 씨가 숙소인 비치호텔을 나간 시간이 당초 새벽 4시31분보다 약 13분가량 빠른 4시18분이라고 정정했다. “CCTV에 설정된 시간이 실제 시간보다 12분50초가 빨리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CCTV 설정시간이 계속 잘못돼 있었다는 것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해명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박 씨가 이동한 거리와 시간은 정정이 불가피해졌다. 북측은 “초병이 사고자를 최초 목격한 시간은 새벽 4시50분경이었으며, 위치는 해수욕장 경계 울타리로부터 약 800m 떨어진 지점이었다”고 말을 바꿨다.
또한 “사고자가 2발의 총에 맞아 사망한 지점은 경계선으로부터 약 300m 떨어진 지점이었으며 그 시간은 4시55분에서 5시 사이로 추정된다”고 윤 사장은 밝혔다.
하지만 당시 현장 목격자를 비롯한 증인들은 총소리를 오전 5시20분을 전후해 들었다는 증언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시간이다.
북측과 현대측이 밝힌 것을 종합해 보면 박 씨는 숙소에서 펜스까지 약 1.1km를 포함해 펜스 옆 모래언덕을 넘어 북한 초소 쪽으로 약 800m를 걸었고, 펜스에서 약 300m 떨어진 지점에서 피격당한 것을 감아하면 박 씨는 약 37분간 총 2.4km 정도의 거리를 이동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동거리와 시간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황들이 북측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일각에서는 “남측에서 제기되는 의혹들에 대해 퍼즐 맞추듯 짜 맞춘 듯한 인상이 강하다” 지적이다. 때문에 이 같은 의혹들이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북측이 진상조사에 협조하는 길 밖에 없지만 북측은 아직까지 “수용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