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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을 계기로 그동안 북한 핵폐기를 가로막았던 장애물들이 신속하게 제거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은 힐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하고 떠난 지 하루만인 23일 북한 외무성은 힐 차관보의 방북 결과를 “포괄적이고 생산적”이었다고 긍정 평가해 북한도 ‘2.13 합의’ 이행에 적극 나설 뜻을 내비쳤다.
외무성 대변인은 이날 조선중앙통신과 가진 문답에서 “쌍방은 당면하여 7월 상순에 6자 단장회담과 8월 초 필리핀에서 있게 될 아세안지역연단(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상(장관) 회의기간 6자 외무상 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가능성을 검토하고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앞서 힐 차관보는 방북후 서울로 돌아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7월 초 6자회담 수석대표 회담 개최방안에 대해 긍정적인 뜻을 피력했다”며 “6자 외무장관 회의 개최에 대해서도 서로 협력하기로 얘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6자 외무장관회담 개최 시기에 대해서는 23일 서울을 떠나면서 “우리가 원하는 시간표는 늦은 7월”이라고 말해 6자회담 수석대표 회담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하루라도 빨리 메우려는 미국과 급할 게 없는 북한이 상호 이견 조율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 미북 관계정상화-비핵화, 무엇이 먼저?=힐 차관보는 방북 일정을 마친 뒤 평양을 떠나면서 조선신보 기자가 ‘미국은 조선(북)과 관계정상화가 우선이냐, 비핵화가 우선이냐’는 질문에 “(우리는)문제의 포괄적인 해결을 원하고 있으며 한반도 비핵화는 그 중요한 요소”라고 답변했다.
이에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현재처럼 부시정권이 상대방의 ‘핵무장 해제’를 선차적 목표로 내걸지 않고 두 나라의 관계개선에 의한 ‘포괄적인 문제해결’을 지향한다면 조선(북)도 보조를 재빨리 맞춰나갈 것”이라고 호응했다.
2.13 합의 이전까지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가 이뤄져야 ‘미북 관계정상화’를 할 수 있다는 ‘선(先) 비핵화’ 입장을 고수해왔다.
반면 북측은 적대국인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는 환경이 먼저 조성되어야 함을 강조해왔다. 관계정상화가 비핵화의 전제조건이라는 얘기다.
사실 미북 관계정상화는 북한 입장에서 미국의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고 김정일 체제를 지키며, 주한미군 철수 등 한미군사동맹 균열을 꾀하고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에서 벗어나는 기반이라는 점에서 북한의 오랜 숙원이었다.
결국 양측이 ‘포괄적 해결’을 언급한 것은 두 가지의 선후 문제를 따져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기 보다는 동시해결을 목표로 합의점을 찾자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관계정상화와 비핵화가 따로 떨어져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큰 그림 속에서 ‘행동 대 행동’으로 나아가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미국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한반도의 비핵화’에 있고 관계정상화는 그 연장선에서 있다는 입장이고, 북한은 핵폐기 보다 미국과의 관계정상화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게 사실이다. 즉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
만약 북한의 요구대로 핵폐기보다 미북 관계정상화가 먼저 진행된다면 6자회담의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가 흔들릴 우려가 있어 이번 힐의 방북에서 나온 ‘포괄적 문제해결’이 새롭게 논란이 될 수 있다.
◆ BDA 이후 2.13합의 이행의 변수는?=BDA 해결과 힐 차관보의 방북으로 2.13 초기조치는 이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다수 북한 전문가들은 북핵 폐기에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우선 영변 핵시설이 폐쇄된다고 하더라도 북한이 신고하기로 되어 있는 고농축우라늄(HEU)을 비롯한 ‘모든 핵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한 신고’가 순탄치 않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6자회담 초기 미국측 수석대표를 지낸 제임스 켈리(James Kelly) 전 국무부 차관보는 23일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앞으로 영변 핵시설을 폐쇄한다고 해도 (HEUP을 포함한) 핵개발 목록을 빠짐없이 신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이는 매우 어려운 절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힐 차관보의 방북이 좋은 신호이며 서로 합의사항을 이행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면서도 “그의 방북으로 북한 핵문제가 상당 부분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아직 성급하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커트 캠벨(Kurt Campbell) 자문역도 RFA와의 인터뷰에서 “6자회담이 비교적 빨리 재개될 것이라고 낙관하지만 진정한 회담 진전이 있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고 본다”며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할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고 말했다.
더불어 BDA 문제는 해결됐지만 정상적인 국제금융거래를 바라고 있는 북한으로선 언제든 이 문제를 다시 꺼내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도 22일 “조(북)미 쌍방은 BDA 문제를 완전히 털어버리며 앞으로 금융거래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 위한 방도를 토의했다”고 말해, 미북간에 국제금융거래 문제와 관련한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조선신보는 13일 “조선 측은 금융제재 해제를 2천500만 달러 반환에 국한된 문제로 보지 않고 있다”며 “(북한의 요구는) 종전과 같이 자금을 자유롭게 송금할 수 있게 만들라는 것”이라고 보도해 또다시 2.13 합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