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을 북한 인민과 소통의 해로 만들자


I.



지난달 28일 김정일의 장례식이 끝나고 30일 북한 국방위원회가 발표한 첫 번째 대남성명은 “이명박 역적패당과 영원히 상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실망스럽다”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예상하지 못한바 아니다. 임기 말 이명박 정부와 관계개선을 하여 보수정권 재창출에 기여하기 보다는 ‘남북관계 경색’을 보수타도 선거전략으로 추구하는 좌파연합으로의 정권교체를 바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포기한 한국좌파의 퍼주기가 북한정권의 생존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의 적대적 태도는 겉으로만 ‘김정일 조문’과 관련 있는 듯이 보일 뿐이다. 사실 북한과 한국 내 일각에서 요구하였던 ‘정부의 공식조문’이란 북한의 정책변화에 결코 좋은 영향도 나쁜 영향도 끼칠 수 없다. 일종의 ‘신발 신고 가려운 데 긁기(隔靴搔痒)’에 불과한 조문 논쟁을 국가이성의 유무 차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한반도 문제가 이미 구조적으로 비인간화되었다’는 점을 망각한 결과로서 그 자체가 국가이성의 결여를 의미한다. 다만 북한 정권과 한국의 종북좌파들은 조문논쟁을 남북관계 경색의 ‘핑계’로만 이용할 뿐이다.



과거 김일성-김정일 정권을 뭔가 작은 일로 사이가 틀어진 이웃집 아저씨 정도로 이해하고 무조건 민족화해를 내세운 한국좌파의 인식은 이런 점에서 순진한 망상에 가깝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선군정치라는 공식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는 북한의 경우, 그들의 대남정책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북한인민의 ‘체제피로도’와 이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인식정도’이지, 한국 정부가 부르는 구애(求愛)의 세레나데나 북한체제에 대한 강한 비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진보를 가릴 것 없이 언론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 당면 과제로서 북한과의 공식·비공식 채널의 회복을 들고 있다. 예를 들어 12월 31일 <조선일보>에 실린 윤영관 서울대 교수(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글이 그러하다. 그러나 윤영관 교수는 북한과의 대화채널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시절과는 달리 뇌물이나 굴욕, 일방적 접근을 통해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 시절 그는 청와대 문고리 권력 이종석 전 NSC 사무차장에게 KO패당하고 장관직을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나 이종석과 같은 식으로 대북정책을 수행하여 노무현 정권이 얻은 것이 무엇인가?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의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6년 8월 몇몇 언론사 간부들과 만나 “북한은 인도의 상황과 비슷한데, 인도는 핵 보유가 용인되고 북한은 왜 안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불안하다고 느끼겠느냐? 북핵 문제에 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다음 정부로 이 문제를 넘길 수밖에 없다. 한국의 국방력 강화는 북한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적 태세를 갖추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북정책의 핵심을 ‘위기예방을 위한 부드러운 대북접근’으로 보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의 사고 깊숙이 자기기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일부 소비자들이 친환경제품 몇 개를 구매하면 친환경정책이 구현되는 것으로 착각하듯이, 스스로 매우 유연하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대북전문가들은 ‘한국이 북에 부드럽고 유연하게 접근하면 남북관계 자체도 부드럽고 유연하게 바뀔 것이다’라거나, 적어도 ‘전자가 후자의 필요조건일 것이다’라는 자기기만에 잡혀 있다. 이들은 남북관계가 바라는 데로 정상화되지 않더라도 ‘그냥 정상화 되었다’고 믿어버린다. 북핵이 폐기되지 않더라도 ‘북핵은 그냥 안전하다’고 믿어버린다. 자기성찰 능력이 없는 자들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다.



200만에서 300만을 굶어 죽인 정권을 놓고 볼 때 인간적인 접근이란 무의미하고 무책임할 뿐이다. 차라리 북한을 보는 태도로서 정치공학적, 인간공학적 태도가 결과적으로 훨씬 더 인간적일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정책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북한인민이 느끼는 체제피로도와 이에 대한 북한지도부의 인식정도에 대한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측정과 개입, 그리고 한국 내의 여론 조절을 위한 적절한 선무(宣撫)행위가 대북정책의 관건임을 이해해야 한다.



II.



일단 평양 이외의 지방의 경우 오랫동안 배급이 끊기고 오로지 장마당 시장경제를 통해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방주민이 느끼는 체제피로도는 이미 극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버림받은 북한인민은 이들의 고단한 심신에 남아 있는 얼마간의 생산력을 군과 특권층을 위하여 탈진할 때까지 쥐어짜내는 인간원료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처럼 마지막 고혈까지 압착·착취된 북한인민을 북한정권은 외부로부터 식량원조를 받아 착복하기 위하여 쇼윈도 위에 내세운다. 물론 북한을 방문한 국제원조기구는 북한인민이 ‘정말로’ 식량난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음을 확인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라는 맹자의 구절이 절로 입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이쯤 되면 우리는 북한정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도덕성과 싸우게 된다.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가 ‘선민(先民)’을 위한 대북 협력은 하지 않으면서 북한당국에 선군(先軍) 말고 선민을 하라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 사람을 존중하는 우리 정치사회의 기본 가치관에 충실하자는 이야기다”라는 윤병관 교수의 주장은 ‘북한참상 뮤직박스’의 레버를 당기면 자동으로 들리는 인간공학의 비명이다.



다른 한편 북한정권의 향배를 결정한 수 있는 또 다른 요인은 평양시민의 의식이다. 만일 평양시민이 변화를 강하게 원한다면 북한의 폐쇄체제 유지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북한정권이 해결해야 하는 급선무 중의 하나는 평양시민의 이해관계와 북한체제의 존재조건을 일치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 북한정권은 특별배려를 통해 평양시민의 삶을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만들고 상대적으로 정상화해야 한다. 북한정권은 마치 사지가 마비되어도 눈과 손만 컴퓨터 오락에 빠져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행복에 겨운 삶’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한다.



북한에서 나오는 이중의 풍경은 사실 평양 이외의 지방과 평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극심한 궁핍의 풍경과 함께, 중국은 물론 한국과 외국산 사치품들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풍요의 풍경이 북한으로부터 나온다. 김정일의 장례식에는 링컨 콘티넨털부터 벤츠에 이르는 최고급 차량이 즐비하였다. 한국에서는 이 유명한 독일제 차량을 한 번도 타보지 못한 사람은 필자를 제외하고도 부지기수다.


이 두 개의 상이한 풍경이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대부분의 인민을 굶도록 방치함으로써 먹고 입힐 정권의 짐을 덜고, 평양의 특권층을 무대장치 방패막이로 사용하여 체제보위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이 궁핍과 풍요의 모습은 북한의 영원한 풍경이 아니다. 궁핍과 풍요는 체제에 대한 다수 인민의 무관심과 체제 핵심계층의 배반으로 바뀔 수 있다. 한쪽 다리는 끌어도 따라오지 않고 다른 한쪽 다리는 자기 멋대로 움직이면 그 체제는 끝이 난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와는 ‘영원히’ 상종하지 않겠다는 북한정권의 태도에 대해 정부는 일희일비(一喜一悲)할 필요가 없다. 이들이 지금까지 내뱉은 ‘영원히’라는 부사를 모두 모아 놓으려면 아마 ‘영원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중요한 점은 한국정부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강력한 개입정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III.



우선 배급이 끊긴 북한의 지방주민들이 직접 혜택을 볼 수 있는 식량·의료지원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국제기구를 통하거나, 배급투명성을 확보한다는 전제하에 민간단체의 도움을 받는 것도 가능하다. 이들 궁핍한 북한인민들에게 직접 접근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지만 불가능할 경우 차선책도 취할 필요가 있다.


필요하면 탈북자들의 개인 송금루트를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식량원조의 경우 북한정권, 평양의 특권층 혹은 군부에서 상당부분 가로 챌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북한이 배급투명성의 개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식량지원의 경우 배급과정의 손실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 것인지는 참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다. 중요한 점은 현재 폭등하고 있는 북한의 식량가격을 내리는 것이다.



반드시 식량지원과 짝을 지어 동시에 해야 할 일은 평양시민의 의식변화에 필요한 정보제공이다. 여기서 정보제공이란 북한의 체제붕괴를 요구하는 적대적 내용이 아니라 한국과 세계의 소식, 문화, 오락 프로그램을 전하는 정도로 충분하다. 즉 평양의 특권층이 한국의 대북정보로부터 실질적인 이익을 얻도록 만들어야 한다.


바꿔 말해 평양시민들에게 자신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특권과 체제변화가 이루어지면 누릴 수도 있는 혜택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북한정권으로 하여금 더 많은 특별대우를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동독에서 호네커에게 반대하는 시민운동의 배경에는 바로 이와 같은 동서독의 생활수준의 차이가 깔려 있었다.



이런 점에서 남북의 체제경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보 같은 외부의 정치세력’들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며 ‘북한의 체제변화란 결코 없다’는 포스트-김정일 지배집단에게 우리는 서운해 할 것도 애석해 할 일도 없다. 체제경쟁이란 본질적으로 남북의 인민이 상대방 체제의 현실을 알아야 시작 가능하고 종결가능하다. 이제 한국은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북한인민과 직접소통의 길을 찾아야 한다.



끝으로 북한인권법의 통과를 위해 이명박 정부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한나라당이나 야당이나 북한인권법 통과에는 관심이 없지만, 어쩌면 19대 국회나 차기 정권으로 이 문제가 넘어가지 않는 것에 공통의 이해가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북한정권은 발광을 할 것이며 협박도 남발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사후 ‘문 닫아 걸고 강성대국의 문패를 걸겠다’는 지금이 북한인민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최적의 순간이다.



특히 북한인민에 대한 지원이나 정보제공, 그리고 북한인권법의 필요성을 한국의 20~40대 계층에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평양시민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정보제공은 북한사회의 의식과 무의식을 잠식해 들어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비윤리적이라거나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있는 그대로 소통하고 알리자는 데에 무슨 반대가 있을 수 있나? 지금은 소통이 화두인 시대가 아닌가? 더구나 적대적인 내용이 아니라 한국과 세계의 모습을 북한인민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한국의 어떤 이념집단이, 세계의 어떤 나라에서 문제시 삼을 수 있을까?



물론 북한정권은 협박과 심지어 대남도발을 강행할 수도 있고, 총선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표에 눈이 먼 정치가들이 ‘전쟁위기’ 운운하며 반대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협박과 대남도발은 북한인민과의 직접 소통 노력을 하지 않고 북한정권에 대한 햇볕정책을 실행하더라도 수령체제의 구조와 북한사회의 계급차이로 인해 항상 일어나게 되어 있는 ‘한반도 상수’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어떤 정파의 이해관계에도 구애 받지 말고, 또 2013년 차기 정권을 누가 잡더라도 결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대북 식량지원체계, 강력한 정보제공 인프라, 북한인권보호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미 종북좌파와 야권연합은 물론, 한나라당부터 反MB로 나서면서 현 정부와 거리를 두겠다고 천명한 만큼, 차라리 내년 1년은 이명박 정부에게 지금까지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며 못했던 일들을 과감하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지금까지 ‘네가 △△△하면 나는 ○○○ 해줄께’라는 식의 접근은 과대망상환자 김정일을 다루는 유효한 대북정책이었다. 그러나 김정일 사후 원년이나 다름없는 2012년은 북한인민과의 직접소통채널을 타방의 반응에 구애받지 말고 당당하게 구축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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