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북한전망과 김정일 정권의 운명①

새해 들어 각 신문에 김정일 정권의 미래와 관련한 특집기사들이 많이 실렸다.

‘김정일 정권 교체 이후’ ‘북한의 체제붕괴 가능성’ ‘군부 쿠데타 가능성’ 등등 북한의 불안한 미래와 관련한 내용이 대종이다. 개중에는 북한의 현실을 반영한 비교적 정확한 분석도 있고, 사실과 맞지 않는 전망도 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새해 특집기사로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김정일 정권이 매우 불안해 보인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90년대 중반 식량난 시기에도 북한체제 붕괴 가능성이 대두된 바 있다. 그러나 붕괴가 현실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김일성’이라는 절대 카리스마의 공백 상황에서도 체제가 붕괴되지 않았으니, 북한사회는 나름의 특이한 체제 내구력이 있다는 의견도 대두되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북한 특유의 내구력’을 강조하며 체제 붕괴 가능성을 일축하는 주장도 있다.

90년대 중반의 북한 조기붕괴론은 잘못 분석된 것이었다. 외부의 분석은 주로 김일성 사망(94년)에 초점을 맞추었다. 요약하면, 절대 권력자 김일성이 사망했으니 북한도 끝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북한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데서 기인했다. 당시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지 이미 20년 정도 지났고 80년대 중반부터 김일성을 대신하여 실제로 권력을 행사한 지도 10년쯤 된 시점이었다. 또 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여 군부도 장악한 뒤였다. 통치권 자체에 결정적인 누수현상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김정일은 이 시기에 외부와 완전히 빗장을 걸고 사소한 범죄도 공개처형하는 등 극도의 공포정치와 감시, 통제로 체제 누수현상을 막았다.

또 북한을 둘러싼 외부 환경도 조기붕괴를 막아주었다. 94년 미·북 제네바 합의에 성공했고,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또 무엇보다 배후에 있는 중국이 북한의 붕괴를 원하지 않았다.

북, 10년 전과 오늘 무엇이 달라졌나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북한의 대내외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무엇보다 국제사회와 김정일 정권이 대립해 있다는 것이다.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 거듭된 군사모험주의 노선으로 미국과 유엔의 대북제재가 과거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김정일 정권이 이같은 상황을 전면적으로 타개하면서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으로 나갈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즉 군 중심의 내부 결속을 위해서라도 선군노선을 포기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또 중국이 과거와 달리 더이상 북한에 우호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중국의 대북정책은 여전히 ‘현상유지’라고 할 수 있지만, 김정일 정권이 계속 강경 선군노선으로 갈 경우 중국도 대북제재를 거부하기만은 어렵다는 것이다. 중국이 언제쯤 대북제재에 적극적으로 나올지는 예상하기 어렵지만 만약 북한이 추가 핵실험을 하는 등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경우 중국도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여론을 계속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북한의 내부 사정도 많이 바뀌었다. 90년대 중반 대량탈북사태 이후 10년간 외부 정보가 꾸준히 유입됐고, 자생적 시장이 확대되었다. 장사로 먹고사는 사람이 대폭 늘어난 것이다. 장사는 개개인의 상(商)거래 행위다. 장사로 먹고사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말은 북한체제의 근간이 되는 ‘집단 동원체제’에 금이 가고 있다는 뜻이다. 국가 생산력의 자체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장사가 늘어나는 현상은 동원체제에서는 독약과 같다.

또 지금은 북한주민들 대다수가 중국과 남한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주민들 의식이 많이 바뀐 것이다. 김정일은 김일성 만큼의 카리스마를 갖고 있지 않다. 김정일과 당의 권위도 많이 추락했다. 주민 몇 명이 모이면 친한 사람끼리는 김정일에 대한 험담이 오가고 당과 국가기관의 부패와 무능, 현실을 개탄하는 소리가 나온다.

이같은 내외적 환경과 조건을 감안하면 북한사회는 이미 해체의 길에 들어서 있으며, 그 시기와 경로를 정확히 예측하긴 힘들지만 김정일 정권의 붕괴는 우리에게 닥쳐올 엄연한 현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우리의 대북정책은 남북간 평화공존 상태를 지키고, 햇볕정책으로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정책은 김정일 정권의 선군노선을 약화시키는 데 실패했고 나아가 북한의 핵실험으로 남북간 평화공존 유지를 위한 군사적 대칭구조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북한의 핵실험이 오로지 남한의 잘못된 대북정책 때문이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지만,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북정책의 실패가 엄연한 현실로 입증됐다는 사실이다. 현실로 엄연히 입증된 사실을 부인하거나 ‘미국책임론’ 등으로 전가하는 행위는 그 개개인들의 비겁함을 떠나 국가적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1)김정일 정권의 본질을 정확히 진단하고 2)그동안 대북정책이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한 뒤 3)실현가능하며 올바른 대북정책의 방향을 정립하고 4)그 방향에서 새로운 대북정책을 수행할 전략전술을 세우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햇볕정책, 대북진단 오진(誤診)이 화근

현재 정부여당이나 학계 일부에서 ‘햇볕정책 유효론’이 여전히 남아 있으나 이미 햇볕정책은 대북전략이기 보다 국내 정치용 구호로 전락한 느낌이다.

따라서 올해 국내 정치지형이 크게 바뀔 경우 햇볕정책은 폐기되거나, 형체를 유지한다 해도 내용적으로 대폭 수정이 불가피하다. 이는 햇볕정책이 대북정책으로서 실패했다는 결론이다.

햇볕정책은 당초 북한의 폐쇄된 빗장을 풀고 개혁개방으로 유도하자는 목적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 시기 햇볕정책 입안자들은 “북한이 생존하려면 개혁개방으로 나가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우리가 도와주면 된다”고 판단했다. 이 판단은 결국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됐다.

김정일 정권은 개혁개방으로 국가운영의 큰 방향을 틀지 않고 햇볕정책을 역이용하면서 선군노선을 더 강화하고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를 지키는 방향으로 갔다. 햇볕정책의 예상 기대와는 반대로 나간 것이다. 핵실험은 그같은 선군노선의 정점에서 폭발했다.

햇볕정책 실패의 근본원인은 사실 아주 간명하다. 김정일이라는 상대를 잘못 읽은 것이다. 한마디로 상대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지피'(知彼)에서 실패한 것이다.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가면 좋겠다’는 주관적 희망사항을 ‘개혁개방으로 나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로 오판한 것이 근본 잘못이었다.

의사의 의료행위에 비유하자면 명백한 오진(誤診)이었다. 병질환에 대한 초기진단이 애초에 잘못되었으니, 치료의 방법에서도 성공할 리 없는 것이다. 그 ‘오진’의 결과 도리어 한미동맹 파괴와 정신적 내전(內戰) 수준의 남남갈등을 초래했다. 햇볕정책으로 인해 우리의 내상(內傷)만 깊어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우리 앞에 놓인 김정일 정권의 ‘근본문제’를 다시 진단해야 한다. 그 ‘근본문제’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대략 3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김정일 정권은 과연 핵을 포기할 수 있는가?
둘째, 김정일 정권은 과연 개혁개방으로 나갈 수 있는가?
셋째. 김정일 정권이 개혁개방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이 세가지 물음은 이미 10년 전부터 되풀이 되어온 것이고, 이 물음을 둘러싸고 북핵이 협상용이냐 보유용이냐, 북한이 변했느냐 안 변했느냐, 햇볕정책이 유효하냐 아니냐, 심지어 ‘그럼, 전쟁하자는 것이냐?’는 전혀 엉뚱한 논란까지 불러 일으켰다.

이 세가지는 또 2007년 말 대선까지 이른바 ‘전쟁세력이냐, 평화세력이냐’는, 순전히 정치선전용 상징조작으로 변질되어 유권자들을 현혹시킬 전망이다.

따라서 이 세가지 근본물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매우 중요하며, 그 인식의 기초 위에서 대북전략의 방향이 정해져야 할 것이다.

1)김정일 정권은 과연 핵을 포기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지난 10여년간 북한정권의 대외전략 패턴을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90년대 초 1차 북핵사태부터 김정일 정권의 생존방식 사이클은 핵개발, 미사일 발사 등을 통한 한반도 주변 군사적 긴장유발→긴장유발후 협상돌입→주변국 경제원조→또다른 긴장유발→협상돌입 →주변국 경제원조의 순환을 보여왔다.

그동안의 남북관계 역시 이 틀 안에서 북한이 남북대화에 나서는 조건으로 쌀, 비료 등이 지원돼 왔다. 장관급 회담에 임한다는 조건으로, 또 6자회담에 복귀한다는 조건으로 남한과 중국이 지원해온 것이다. 이것이 김정일의 정권유지와 생존방법이었다.

이 말은 핵무기와 같은 군사적 긴장유발 수단이 없어지면 김정일은 정권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즉 핵이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김정일로서는 독재정권 유지가 자신의 ‘모든 것’인데, 핵을 포기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따라서 김정일에게 핵을 포기하라는 말은 ‘네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말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이 핵을 포기하는 ‘사태’는 오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다만 김정일이 중국과 남한을 적절히 이용해보자는 의도로, 마치 핵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제스처’를 보여줄 수는 있을 것이다. 유엔과 미국의 대북제재를 먼저 해제하면 핵실험장을 폐쇄해줄 수 있다, 경수로를 주면 핵개발 활동을 현 상태에서 동결해줄 수 있다, 미국이 대북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면 조선반도 비핵화는 가능하다는 발언 등등이 그런 예다. 그러나 이미 완성된 핵무기나 핵프로그램을 포기(CVID)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김정일은 올해에 몇 가지 ‘제스처’들을 보여주며 남한내 대선정국에 영향을 미치려 하거나 중국의 지원을 얻어내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미 김정일의 전략패턴을 경험한 미, 일이 대북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김정일의 의도대로 풀려가기도 어렵다. 따라서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2007년에는 북한의 추가 핵실험 등 오히려 긴장이 더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2)김정일 정권은 과연 개혁개방으로 나갈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도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간단히 말해 북한정권이 중국식이나 동유럽식 개혁개방으로 나갈 뜻이 있었다면 벌써 나갔을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정권이 개혁개방으로 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적어도 세 번은 있었다. 첫번째는 7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 시동 시기, 두번째 90년 동유럽 체제전환과 94년 김일성 사망후, 세번째가 2000~2002년 주변국과의 관계정상화 모색 시기다. 그러나 북한정권은 세 번 모두 거부했다.

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시동을 걸자 김정일은 중국을 ‘수정주의’로 격렬히 비난했다. 심지어 97년 1월 덩샤오핑이 사망했는데도 김정일은 평양의 중국 대사관에 조문조차 가지 않았다. 2000년 이후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한 것은 오로지 경제지원 및 대미관계에서 중국을 이용해보자는 취지였다.

또 90년대 초 동유럽이 잇따라 체제전환을 하자 김정일은 ‘사회주의 모기장 이론’을 설파하며 더욱 빗장을 걸어 잠궜다. 김정일은 동유럽 붕괴 근본이유를 계급독재-수령독재가 약화됐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 시기도 김정일은 세계 흐름과 정반대로 나갔다.

2000년 김정일은 장쩌민 주석, 김대중 대통령과 잇따라 정상회담을 갖고 2002년 고이즈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는 등 주변국과 관계정상화를 모색했다.

2000년 10월 조명록의 방미와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 특히 그 해 말 미 클린턴 대통령의 김정일 방미초청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와 개혁개방으로 갈 수 있는 결정적 계기였다. 그러나 김대중 당시 대통령에게 보낸 김정일 방미 초청장은 김정일의 방미 거부로 결국 무산됐다(2003년 6월 15일 김대중 전 대통령 KBS ‘일요스페셜’ 출연 증언).

북한이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하려면 핵을 포기해야 하는데, 김정일은 핵무기냐, 미국과의 관계개선 및 개혁개방이냐의 결정적 기로에서 결국 핵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서 김정일 정권이 스스로 핵을 포기할 생각도, 개혁개방할 의지도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계속).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