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바이털 이슈’

노무현 정부의 외교능력을 생각하면 2005년 우리의 대외관계가 꽤 걱정스럽다. 한미관계가 그렇다. 철지난 이야기지만 11월 20일 칠레에서 열린 APEC 한미 정상회담 때 노대통령은 부시대통령에게 “북핵문제를 미국의 대외정책 1순위로 올려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부시대통령은 “바이털 이슈(vital issue)로 다루겠다”고 응답했다.

‘바이털 이슈’는 백악관 소속 미 국익위원회가 정한 정책 우선등급 1순위다. 바이털(vital)이슈 – 베리 임포턴트(very important)이슈 – 저스트 임포턴트(just important)이슈 – 세컨드리(secondary)이슈 순으로 등급이 매겨져 있다. ‘바이털 이슈’는 ‘최우선 핵심사안’에 해당하는 등급이다. 미국의 對이라크 전쟁이 여기에 해당한다. 미 정치학회에서 사용하는 등급은 좀 다르다. 서바이벌(survival)이슈 – 바이털(vital)이슈 – 메이저(major)이슈 등의 순으로 내려간다. 부시대통령은 백악관 국익위원회에서 정한 ‘바이털 이슈’를 사용했다. 정치학회 등급으로는 ‘서바이벌 이슈’에 해당한다.

‘바이털 이슈’라는 표현을 둘러싸고 외교부와 NSC(국가안전보장회의)의 해석이 달라 잠시 혼란을 빚기도 했다. 외교부는 ‘매우 중요한’으로, NSC는 ‘사활적인’으로 발표했다. 외교부의 발표는 표현만 놓고 보면 미 국익위원회 등급 2순위(very important issue)에 해당한다. 우리정부가 미국의 정책순위 등급조차 모르고 있었다면 한심한 일이고, 속사정이야 어찌됐든 NSC와 외교부를 비롯한 외교안보라인이 매우 취약한 것은 틀림없는 듯싶다. ‘번역’상의 오류를 문제 삼자는 게 아니다. 노대통령은 LA에서 “북한의 핵보유도 일리있다” “한국 주도로 북핵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APEC에서는 6자회담 안에서 ‘평화적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자고 했다.

문제는 한미 양국이 북핵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노대통령의 ‘복심’(腹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남북간 담판을 지어 북핵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인지, 6자회담 틀 안에서 한미 공조에 우선순위를 두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정체가 불분명한 것이다. 만약 ‘남북간 담판’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로또대박’을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다. 한미공조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LA발언은 분명한 자해행위다. 그렇다면 노대통령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시선의 종착지는 결국 김정일과의 공조인가?

들리는 이야기로는 미 국무부 실무자들도 노대통령이 상대방 앞에서는 장단을 맞춰주다가 다른 데 가서 엉뚱한 소리한다는 사실을 대체로 알고 있다 한다.
국가간 동맹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상호신뢰다.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정치 군사 경제 사회문화영역에서 호혜협력관계가 확대되어 가는 것이 외교다. 외교관계에서 돌아서서 딴소리하면 ‘당신과는 이제부터 친구 안 하겠다’는 메시지나 다를 바 없다. 미국에서 ‘믿지 못할(uncredible) 사람’이라는 표현은 그 말 자체가 욕설에 해당한다. 미 국무부 직원들이 내심 노대통령을 ‘믿지 못할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이라크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2005년 미국은 북핵문제를 ‘바이털 이슈’로 다룰 게 틀림없고 해결방식도 CVID(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핵폐기)라는 목표에 수정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다만 2기 부시행정부 초반에는 일방주의보다 국제협력 쪽에 무게를 두게 될 것 같다. 만약 노무현 정부가 김정일 정권의 눈치나 보면서 계속 줏대없이 행동하거나, 은밀히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정부-여당의 지지도나 잠깐 끌어올리려는 ‘잔머리’를 굴릴 경우, 2005년 한미관계는 중대한 파국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미 행정부는 노무현 정부와 아예 선을 그으려 할 것이다.

북핵문제를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방안) 틀에서 다룰 여지는 충분히 남아 있다. 6자회담이 질척거리면서 미국이 PSI 틀을 가동하고 여기에 우리가 끝내 참여하지 않을 경우, 한국은 미국 일본 유럽 호주 등으로부터 ‘왕따’되면서, 중국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정일과 둘이서 ‘촌놈들의 탱고’를 추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는 남북한이 같이 망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 때문에 2005년 노무현 정부로서는 남북관계보다 한미관계를 ‘바이털 이슈’로 삼는 게 전략적으로 옳은 노선이다. 이제 노대통령은 ‘미국에 할말은 좀 하는 편’ 식의 수준 낮은 대중영합적 사고방식을 털어내고, 무엇이 진정으로 한국의 앞날과 국제사회에 도움이 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2005년에는 김정일 정권에 할말은 하고, 듣지 않으면 ‘깽판’도 쳐야 한다.

손광주 편집인 sohnkj21@daily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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