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막바지, 이해찬 총리 발언을 들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추구해온 방향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지역감정을 해소하겠다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노무현식 ‘지배세력 교체’다.

대통령 당선 후 지금까지 그의 발언과 정치적 행보를 종합해보면 이 두 가지 방향으로 크게 수렴된다.

수도분할법이나 과거사법, 신문법, 사학법 등등이 노무현식 사고방식의 근저에 ‘잘못돼온 지배세력의 역사를 한번 교체해보겠다’는 인식이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과의 동맹강화는 지배세력의 굴종적 사대주의가 되는 것이고, ‘우리민족끼리’는 민족자주권의 회복인 동시에 피지배 세력이 주동하는 ‘역사의 진보’가 되는 것이다.

노대통령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공부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발언들을 유심히 보면 간략한 지배-피지배 등식의 유사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과 80년대 학생운동권의 민족주의에 기반한 NL적 사고방식이 어설픈 형태로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인문, 사회분야에 대한 지식들이 체계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결합돼 있고, 여기에 자신의 정치적 손익관계를 판단하는 동물적 승부감각과 이성적 합리주의 대신 감성적 솔직함이 더해져 ‘정치인 노무현’으로 총화돼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과 개인 노무현이 내면에서조차 정확히 ‘위치조정’이 안된 상태에서, 설익은 사회역사관을 가진 정치인 노무현으로서 대통령직을 수행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냉철한 합리주의가 요구되는 국제관계는 물론 경제, 정치, 각종 사회문화 분야의 ‘개혁’이란 것이 대체로 지배-피지배 등식에 입각한 ‘뒤집기 형태’로 되면서 ‘진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다.

정권사수의 길은 북방이 길방?

임기 절반을 경과하면서 지지율에서 보듯 이 정부는 이미 실패의 길에서 빠져 나오기 힘든 상황으로 가고 있다. 그 만병의 근원이 80년대 대학교 2, 3학년 수준의 어설픈 사회역사관에 있는 것이다. 또 대통령의 측근과 여당 386 의원들은 구시대 역사관에 근본적인 수정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기회주의적 ‘여의도 정치인’으로 바뀌었고, 정권의 잔여기간 동안 자신의 역사관을 충분히 수정할 정도의 시간적 여유도 없다.

사정이 이렇게 된 조건에서 노정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목숨을 다해’ 정권을 지키는 것밖에 없다. 그러한 승부욕이 더욱 이성과 합리주의를 마비시키게 되리라는 것쯤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승부근성과 정권사수 욕망이 불러오는 1차 위기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국가정보기관이 이미 팩트(fact)로 인정한 북한 위조달러를 ‘결정적 증거가 부족하다’며 외면하는 것도 욕망이 사실을 덮어버린 경우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래도 국민들에게 뭔가 있는 것처럼 보여주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 가치인 인권문제를 ‘식량권 우선’이라는 말로 둘러대거나, 북한주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니까 국가인원위의 재량 밖에 있다는 등의 발언은 그 본질에서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사실관계 외면에서 이어지는 2차 위기다.

3차 위기는 거짓말의 수준을 훨씬 더 높이고 체계화하는 것이다. 즉 사기극을 벌이는 것이다. 유사 이래 사기극을 가장 극단적으로 체계화 해온 대표적인 사례가 지금 북한 정권이다. 김정일이 자신을 21세기의 태양으로 부르게 한다든가, 스스로 ‘조국’이 되어 ‘조국 결사옹위’를 부르짖도록 하는 것은 사기극의 최고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사기극에 필요한 요소는 ‘세뇌’다. 북한정권은 지금까지 세뇌와 폭력을 통치의 두 기둥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폭력을 사용하기란 쉽지 않다. 또 세뇌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노정부가 가게 될 방향은 어디일까. 그것은 ‘실체’는 없으면서 단기간 내에 집단최면을 거는 방법, 즉 십중팔구 ‘북쪽’이 될 것이다. ‘북한’은 정권이 국민을 상대로 최면을 거는 데 여러모로 유리하다. 경제나 정치, 교육 분야 등은 남한 내에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실력이 없으면 들키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남북문제는 검증이 쉽지 않을뿐더러 민족주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다. 6. 15 공동선언 이후 남한은 줄기차게 북한을 지원해주었지만, 북한정권이 한 일은 핵무기 보유였다. 이 명백한 사실을 놓고도 아직 햇볕정책이 유효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남북문제의 몽환적 위력을 알 수 있다. 경제분야를 비롯해서 제대로 성공한 게 없는 노정권은 결국 남북문제를 통해 또한번 뒤집기 쇼를 벌이고 국민들의 몽환을 불러일으키면서 정권사수로 달려가려고 할 것이다.

남한은 실물제공, 북한은 ‘말’ 제공

내년에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다면 6.15 공동선언에 이어 또 한번 실체가 없는 ‘선언’이 나올 가능성이 없지 않다. 예컨대 한반도 평화체제구축이라는 명분을 걸고 ‘한반도평화선언’ 비슷한 것을 추진하면서 남한은 헌법개정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북한은 선군(先軍)과 장군님 체제에서 이미 현실적 효력을 상실한 조선노동당 규약을 일부 개정해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민족끼리 ‘위장 평화선언’을 하고, 그 바탕 위에서 언제까지, 어떤 단계를 거쳐 통일을 논의한다는 식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평화체제구축은 핵폐기를 비롯한 실질적인 군축이 실체가 있는 것이며, 선언은 실체가 없다. 6.15 공동선언 후 지금까지 남한은 실체가 있는 돈과 물자를 주었고, 북한은 실체가 없는 ‘말’과 ‘선전’을 제공해왔다. 차기 정상회담 역시 이 기이한 맞바꿈의 틀이 재현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 북한은 어찌됐든 6자회담에 참여하고 있는 만큼, 김정일은 정상회담을 하면서 ‘비핵화는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반드시 실현한다’는 ‘말’을 제공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이밖에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한반도경제공동체 건설, 북한의 자원개발 참여, 인프라 건설 등은 정상회담 ‘선언’의 장식품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29일 이해찬 총리는 “우리는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남북정상회담에 응하겠다”고 발언했다.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은 DJ가 정상회담 전 김정일에게 구애하면서 입버릇처럼 말하던 표현이었다.

아무래도 내년에 우리 국민들은 남북한 정권이 벌이는 또 하나의 위장 사기극을 보게 될 것 같다. 2005년의 끝을 보내면서 황우석 파동의 막바지와 내년도 남북정상회담 장면이 오버랩 된다.

손광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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