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나진 反김정일 삐라… 軍, 꽃제비 구타가 촉발

▲2006년 5월 함경남도 단천역 근처 장마당에 붙었던 벽보.‘선군정치 바람에 백성이 굶어 죽는다. 군대들에게만 주지 말고 인민들부터 쌀을 달라’ 고 적혀 있다. 기사 내용과는 무관.

우리 아버지는 지독히도 주체사상을 신봉하시던 분이었다. 군대 상관의 잘못으로 탄광에 추방당해도, 굶어 죽기 직전에 처해도 ‘장군님 찬양’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국경을 넘을 때도 나는 그런 아버지를 두고 차마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때가 북한에서 식량난이 극심하던 1998년, 내 나이 열네살이었다.

남들이 중국으로 탈북할 때 나는 나진행을 선택했다. 마침 아는 형이 나진의 기업소에 배치를 받아 가게 돼서 그곳까지 데려가 줄 것을 부탁했다.

나진은 북한에서 몇 안 되는 개방 지역으로 살기 좋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실제로 함경도에서 가장 생활 수준이 높은 곳이었는데 중국계 회사가 많아 중국과의 장사도 상당히 활성화 돼 있었다.

그러나 나진은 같은 북한이라고는 해도 개방도시라는 명목으로 타지역 주민들의 접근이 금지된 도시였다.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북한에서는 수도 평양이나 국경, 나진에 가기 위해서는 특별 통행증을 받아야 한다. 나진은 삼엄한 경비 속에 지켜지는 일종의 섬이었다.

나진을 둘러싸고 철조망이 몇 km에 걸쳐 빙 둘러처져 있었다. 하지만 국경도 넘는 판에 그런 철조망 때문에 목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차를 타고 나진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나진에서 처음에는 우연히 알게 된 친구 어머니를 도와 옷장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보석장사에 손을 댔다. 강남석이라는 풀색의 보석이었는데 꽤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중국인과도 거래했다.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했다. 각종 식품, 농산물, 공산품은 보통이었고 불법 밀수도 많이 했다. 고려청자나 조선 백자를 밀거래한 적도 있었고, 남한 비디오를 사들인 적도 있었다. 심지어 거래는 하지 않았지만 ‘얼음'(북한산 마약)을 본 적도 있었다. 대부분 적발되면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거래였다. 그러나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중국인들을 알게 되니깐 장사도 훨씬 쉬워졌다. 나는 점차 상류층 친구들도 사귀게 됐고, 나진에서 수완 좋은 장사꾼으로 통하게 됐다.

하지만 기업소의 자제들인 상류층 친구들과 똑같아질 수는 없었다. 나는 부유층 아이들과도 친했지만 또한 꽃제비들과도 친했다. 부유층 애들은 꽃제비 애들을 무시했지만, 난 내 자신이 고생을 많이 해 봤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짐을 나르거나 쌓는 잡일에 나는 꽃제비 애들을 불렀고, 품삯을 주곤 했다.

“솔직히 말해 난 이 사회가 싫다” 고백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로 내 친구들을 다 불러모았다. 술과 안주를 모두 사놓고는, 부유한 친구들까지 다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부유한 애들 앞에서 꽃제비 애들을 소개시켜 주면서 말했다.

“얘네들 다 내 친구들이다. 나나 얘들이나 다 똑같은 친구로 봐줬으면 좋겠다. 잘살든 못살든 친구는 친구 아니냐? 친구를 무시하지 말자.”

이 말에 모두가 다 동의했다. “그래, 친구는 친구다.”

또래에서 잘나가는 내가 아이들에게 화해를 권하니 모두들 따랐다. 젊은이들이 가진 특성인 것 같았다.

그 날 이후 돈독해진 우리들의 관계는 우리 모두를 운명 공동체로 만들어 놓았다. 더 이상 서로를 무시하지 않았고 돈이 많든 적든 친구로서 함께 했다. 나보다 나이 많은 형들까지도 내 부탁을 들어줬다.

내 말을 따라주던 많은 친구들이 좋았고, 고마웠다. 우리는 자주 바닷가에 나가 술을 마시며 진솔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장마당에도 함께 다녔는데, 진짜 폭력배를 만났을 때 죽고 살기로 같이 싸우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점 신뢰는 쌓여갔고, 우리는 공동체라는 의식을 강하게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친해진 우리는 결국 금지된 말까지 거론하게 됐다. 말을 먼저 꺼낸 건 나였다. 속이 썩어 들어가도록 하지 못했던 말, 수용소로 끌려갈까 봐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던 말,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봐 못했던 말. 그 말을 난 결국 꺼내고 말았다. 보석을 팔고 생긴 돈으로 거하게 한 잔 하던 날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솔직히 말해서, 난 이 사회가 싫다. 난, 김정일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순간적으로 내뱉은 말에 나도 너무 당황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맞다!”

갑자기 친구들이 흥분해서 호응하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물꼬를 트자, 물밀듯이 불평이 터져 나왔다.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는 먹고 살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이게 뭐냐’, ‘옛날에 김정일이 자기를 반대하던 사람들 모두 다 죽여 버렸다더라’, ‘우리 엄마 아버지는 죽도록 충성했는데, 그 덕분에 다 굶어 죽어버렸다.’

아이들의 맺혔던 한과 울분, 분노가 그 자리에서 쏟아져 나왔다.

맺혔던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중국 사람들을 만나고, 외부 문물을 접하면서 깨어진 내 사상은 그 날 한을 풀었다. 김정일이 싫다! 이 체제에 염증을 느낀 우리는 그날 “발언의 자유”를 맘껏 누렸다. 외부로는 절대 누출되지 않도록 서로 맹세까지 하며 입막음을 단단히 했다.

삐라사건으로 순식간에 군인들 뒤덮여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장마당에서 우린 어떤 꽃제비 애들이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보기 비참할 정도로 잔인한 장면이었다. 그들은 군인이었다.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걸로 봐서 근무 중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반 사민(私民)이라면 어느 누구도 군인을 건드릴 수 없었다. 괜히 싸웠다가 총에 맞아 죽어도 하소연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그 자리에서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바로 그 군인들에게 달려가 주먹을 날렸다. 내가 나서자 내 친구들도 나섰고, 결국 그 두 명은 도망가고 말았다.

문제는 그 다음 날 일어났다. 군인들이 군용 트럭 두 대에 나눠 타고 장마당으로 몰려왔다. 군인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붙잡고 검열을 했다. 내가 가장 친하게 여기던 형이 먼저 붙잡혔다.

그 형이 먼저 죽도록 맞았다. 군인들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주동자가 누구야? 어, 제대로 안 대?” 군인들은 주동자가 없다면 일반 사민들이 나설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형은 절대 불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들은 난 바로 군인에게 찾아갔다. 내가 덤볐으니 형을 놔주라고 요구했다. 그 순간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난 기절을 하고 말았다.

얼마나 맞았을까, 눈을 떠보니 온몸의 뼈가 쑤시는 가운데 내가 아는 군인 형이 날 깨웠다. 알고 보니 내 친구가 잘 아는 연줄을 이용해 더 이상의 구타는 막아줬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몸 한구석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거지?”

애들을 모았다. 우리는 구타 당하는 꽃제비 애들을 도와준 것뿐이었다. 우리는 폭력에 맞선 것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미약하게, 겨우 군인 두 명과 싸운 것뿐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렇게 죽음의 위협까지 당해야 되는가. 나라를 지켜야 되는 군인들로부터 왜 우리가 맞아야 되는가. 휘몰아치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 때 한 친구가 제안했다. “삐라를 붙이자!”

우리는 즉시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삐라의 문구는 이랬다. “김정일 개새끼” “김정일 썩어져라” “김정일 망해라” “군대만 먹이지 말고 인민도 먹여 살려라” 대략 이런 문구였다. 새벽녘, 우리는 나진의 으슥한 곳을 돌아다니며 삐라를 붙였다.

그 다음 날, 나진은 난리가 났다. 모든 나진 시내가 뒤집어졌고,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군인들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검열이 붙었다.

숨 쉴 새도 없이 그 날 삐라를 직접 붙였던 우리 모두는 나진을 떠나야 했다. 나진을 떠나면서, 우리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같이 행동하면 붙잡힐 것이 뻔했다. 모두가 알아서 자기 갈 길을 가기로 했다.

인사할 틈도 없었다. 그 날 우리는 정말 엄청나게 울었다. 헤어지면서, 다시 만날 것도 제대로 기약하지 못하고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너희들을 버리고 가는구나 라는 생각에 눈 아래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걸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삐라 사건으로 나진을 떠난 것이 2000년도였다.

그 뒤 회령을 통해 탈북한 나는 중국을 전전하다 2005년 한국에 입국했다.

나진을 떠난 이후로는, 어떤 곳에서도 그와 같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다. 목숨 걸고 맹세하며, 반김정일을 외치던 친구들. 나 혼자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친구들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다. 만약 군대가 아니었더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었을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무력 앞에, 우리는 그렇게 쓰러지고 흩어져야만 했다.

북한이 그런 사회다. 시위가 일어날 수가 없다. 누군가 공개적으로 시위를 한다면, 총 소리 한 방으로 끝날 일이다. 그리고 그 총을 쏜 군인은 영웅 대접을 받는 곳이 북한이다.

아직까지도 불안하다. 나야 남한에 있으니 안전하지만, 나머지 친구들은 무사한지 알 길이 없다. 제발 무사히 탈출해서 중국이나 한국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싶다.

잡히지 않았더라고 하더라도 북한에 있다면 안심할 수가 없다. 그 친구들 중 한 명이라도 갇혀있다면, 고문당하고 있다면 난 편히 살 수 없다. 언젠가는 그 친구들과 꼭 연락이 닿기를 바란다. 우리는 목숨을 같이 한, 끊어질 수 없는 친구다.

정용석(가명)/탈북자 2005년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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