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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과 정보·통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세계가 몇 개의 권역으로, 혹은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블록화 되어가고 있다. 전반적인 세계화 진전 추세에서 수많은 가치와 규범들이 충돌하며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지기도, 낡은 것들이 사라지기도 했다.
사상과 이념 역시 마찬가지다. 지구의 절반을 뒤덮은 사회주의 이념만 보더라도 실패한 실험이라는 평가 속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자유주의는 세계화 추세와 함께 다시금 많은 이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화 시대 우리의 이념시장에서 퇴장해야 할 대표적인 사조는 무엇일까? 필자는 가장 먼저 민족주의를 꼽고 싶다.
민족주의가 한국의 근대화와 독립, 해방 이후 경제성장에 기여한 측면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민족주의는 태생적으로 배타적인 속성을 갖기 때문에 세계화 시대에 부정적 측면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민족끼리’를 앞세운 ‘친북 민족주의’가 득세하며 소위 민족주의 퇴행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민족주의 과잉 논란이 일면서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가 가지는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기 위한 연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양대 박찬승 교수가 펴낸『민족주의의 시대』(刊 경인문화사)는 한국의 민족주의 기원을 되짚어 보며,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민족주의의 지위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 민족주의의 태동과 전개과정을 역사적 사료에 근거해 서술하고 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민족주의의 시대는 19세기였다. 한국의 경우 20세기 초 망국의 위기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가 태동했고, 이후 한국사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말, 일제시기, 해방이후로 시기를 나누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전반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세계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지속적인 투쟁을 벌였다. 그 방법에 있어서도 무장투쟁, 외교운동, 의열운동, 만세운동, 문화운동 등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또한 계층적으로는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 등 전 계층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확산됐다.
독립운동의 노선이나 참가 계층은 다양하게 분화해 갔지만, 이들 운동에는 공통분모가 존재 했다. 그것은 반제국주의, 민족자결, 절대독립이라는 3대 기본 이념이었다. 이 가운데 독립운동 진영은 새로운 사상으로서 부르주아자유주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개량주의, 사회민주주의, 아나키즘 등 서구의 정치사상을 수용하면서 점차 분화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분열이라기보다는 사상의 다양화·풍부화로 볼 수 있다고 박 교수는 분석했다. 독립운동 진영은 분화 속에서도 자유, 민주, 평등과 같은 가치를 공통적으로 강조했고, 다만 그 가운데 어떤 가치를 더 강조 했느냐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결론적으로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는 독립운동의 기본이념(반제국주의, 민족자결, 절대독립)이라는 질료로 만들어진 그릇이라고 비유했다. 그 그릇 안에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사민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담겨 있었다.
그는 “민족주의가 민주화 경제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도 “한국인들은 분단된 민족과 국가의 통합과정이 완수될까지는 민족주의를 버릴 수 없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어 “21세기 국제정세의 변화는 한국인들에게도 민족주의라는 무기가 아닌 다른 무기를 준비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며 민족주의 재정립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21세기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한국인들에게 민족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세계화 시대를 이끌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민윤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 시대는 한반도의 평화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공존공영, 더 나아가 인류사회의 통합을 위해 새로운 이념과 비전을 마련해야 할 때다.
박 교수는 그 해답을 국제협조·국제연대에서 찾고 있다. 한국인들은 20세기 민족주의의 시대를 넘어 21세기 국제협조, 국제연대 시대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아직도 민족주의 정서가 팽배한 한국 사학계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위상을 재정립하자는 박 교수의 고언(苦言)은 되새겨볼만한 이야기다.
김민수/자유주의대학생네트워크(jayou2006.net)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