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회담의 쟁점은 무엇이었으며 미국과 서독은 어떻게 해결했는가?

2+4 회담의 주요 쟁점은 ①오더-나이세 국경선 문제, ②통일독일의 병력 상한선 문제, ③동독주둔 소련군 철수 문제, ④통일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잔류문제였다. 이 문제들은 각국의 국가이익은 물론 그 후 유럽정세를 좌우할 중요한 문제들이어서 상당한 논란이 예상되었으나 미국과 서독의 치밀한 준비로 원만히 타결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있었던 준비내용과 설득논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오더-나이세 국경선 문제


오더-나이세 국경선 문제는 소련, 폴란드, 독일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2차 대전 종전 후 소련이 2차 대전시 점령한 폴란드 영토를 돌려주지 않고, 대신 종전 당시 소련이 점령하고 있던 오더-나이세 강 동쪽 독일영토를 폴란드에게 할양해주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독일영토 점령은 국제법적 근거가 없어 독일-소련-폴란드 간에 중요한 분쟁소지로 남아 있었고, 특히 독일은 과거 독일제국 영토의 25%를 포기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 동안 서독정부는 명확한 태도표시는 하지 않았지만 ①브란트의 동방정책이 오더-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한다는 묵시적 전제하에 추진된 것이고, ②동독이 폴란드와의 협정을 통해 오더-나이세 국경을 인정했고, ③미국, 프랑스 등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독일통일을 위해서는 오더-나이세 국경인정이 필요하다는 태도였다. 따라서 독일 내 여론은 현실인정이 불가피하다는 분위기였으나 이를 공식화하는 데는 상당한 진통과 정치적 결단이 필요했다.


콜 정부는 마지막까지 최종결정을 유보하다가 1990년 5월 5일 개최된 제1차 2+4 회담에서 국경선 문제를 일단락 짓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6월 21일 동서독 의회가 오더-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하고 통일 후 폴란드와의 협정체결을 통해 이 문제를 완결한다는 결의안을 각각 가결한 후 이 내용을 폴란드 정부에 통보했다. 이어 7월 17일 개최된 제3차 2+4 회담에서 폴란드 대표가 잠시 참석한 가운데 6개국이 합의를 했다. 이에 따라 동·서독 정부는 8월 31일 서명된 「통일조약」에서 오더-나이세 국경선 동쪽 지역의 옛날 영토를 통일독일의 영토에서 제외했으며, 11월 14일 바르샤바에서 독일과 폴란드 간에 국경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국경선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통일독일의 병력 상한선 문제


통일독일의 병력규모 문제는 주변국들에게 매우 예민한 문제였다. 통일독일이 다시는 침략자나 유럽평화 교란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서독이 2차 대전 후 NATO의 안보우산 밑에서 안보의 무임승차를 했다는 점을 들어 통일독일이 NATO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으나, 소련과 프랑스가 통일독일 병력의 대폭 삭감을 주장함으로써 2+4 회담시 협상대상이 되었다. 서독은 분단 당시 동·서독 병력이 총 66만 5천 명(서독 49만 5천 명, 동독 17만 명)에 달한다는 점과 독일이 징병제이므로 병사들의 숙련도가 낮아 통일 후 40만 명 수준의 병력유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으나 소련은 30만 명 이하를 주장했다. 이 문제는 7월 16일 콜 총리와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의 코커서스 회담에서 다른 여러 문제들과 함께 타결되었다. 소련이 계속 35만 명 선을 고집한데 대해 콜 총리가 35만 명 수준으로의 감축은 현대국가들 가운데는 어느 나라도 이행한 적이 없는 가장 큰 규모의 군축조치라는 점을 설득, 병력 상한선을 37만 명으로 하고 화학·생물·방사능 무기의 제조·소유·사용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독일로서도 유럽정세가 안정되고 통일비용 부담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굳이 병력 상한선을 높일 필요가 없었고, 소련도 만족할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통일 후 독일은 2+4 회담에서 합의된 것보다 적은 35만 명 수준의 병력을 유지했다.


동독주둔 소련군 철수 문제


통일 전 동독에는 38만 명의 소련군과 16만 명의 군속·가족 등 총 54만 명의 군 관련 요원이 주둔하고 있었다. 서독 정부는 소련이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동독주둔 소련군을 철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소련이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파기하고 헝가리 등 동유럽주둔 소련군을 철수하고 있고, 동독주둔 소련군은 탈영, 시위 및 동독주민들과의 충돌 가능성이 예상되는 데다 주둔 비용 부족으로 더 이상 동독 주둔군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독은 소련 군부 내 강경세력을 의식, “소련 내 보수세력들이 ‘폭발’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고르바초프의 자발적 동의를 촉진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이 문제를 처리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교섭에 임했다. 1990년 7월 15일 코커서스 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철수시한을 5~6년으로 주장했으나 서독 측 주장대로 3~4년으로 합의했으며, 서독이 소련군 철수비용(130억 마르크, 약 90억 달러)과 철수 시까지 동독 주둔비(연간 48억 마르크)의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합의가 가능해졌다. 독일통일 후 1990년 10월 9일 서독 수도 본(Bonn)에서 바이겔 독일 재무장관과 테레초프 소련대사 간에 「동독주둔 소련점령군의 체류 및 철수를 위한 과도기적 조치에 관한 협정」에 서명하고, 10월 12일 겐셔 외무장관과 테레초프 대사 간에 「소련군의 기한부 주둔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으며, 1994년 8월 31일 마지막 소련군이 동독에서 철수함으로써 철수작업이 완료되었다.


통일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잔류문제


통일독일의 군사적 지위와 동맹선택 문제, 즉 통일독일의 NATO 잔류문제는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미국은 이미 1989년 10월 동독시위가 발생했을 때 독일통일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통일독일의 NATO 잔류문제가 가장 핵심적 문제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11월 28일 콜 총리가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한 다음 날 베이커 국무장관이 통일독일의 NATO 잔류를 독일통일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서독도 일찍부터 통일독일의 군사적 지위 문제가 통일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될 것으로 예견하고 「10개항 계획」 발표 시에는 의도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으며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1990년 2월 이후에는 독일이 통일 후에도 NATO 정회원국으로 잔류할 것이며, 미군은 유럽의 “안전보장자”로서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입장을 확고히 표시했으며, 그 후부터 양국은 긴밀한 공조 하에 소련설득에 나설 수 있었다. 특히 미국은 이 문제를 명확히 하지 않을 경우 장래 통일독일이 자국 영토의 비무장화를 선언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 다음과 같은 방침 하에 소련 설득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①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최종의정서의 자결권 조항에 따라 2차 대전 전승 4대국(Four)이 동서독(Two)의 통일선택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확고히 견지한다.
② 독일통일 후 NATO 관할권은 1인치도 확대되지 않을 것이며 특히 동독영토 안으로 군사력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장한다.
③ NATO가 ‘악귀’가 아니고 소련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해 특히 7월 런던 개최 NATO 정상회담과 휴스턴 개최 G-7 정상회담을 적극 활용한다.
④ NATO는 바르샤바 조약기구(WTO)가 없어져도 존속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시킨다.
⑤ 통일되고 독립적인 독일이 NATO 밖에 있도록 방치한다는 것은 소련과 유럽 모두를 위해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⑥ 통일독일이 중립화되면 소련군은 600km 밖으로 물러나지만 미군은 4,800km 밖으로 물러나야 하므로 이를 절대 수락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시킨다.
⑦ 소련의 강경태도가 보수 세력을 의식한 ‘국내용’일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여 7월 2~13일간 개최되는 소련 공산당 제28차 전당대회에 유념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설득한다.


한편 서독은 미국과는 별도로 ①통일독일과의 우호협력 관계를 가질 때 소련이 얻게 될 경제적 이득을 인식시키고, ②경제지원 외에 무형의 신뢰를 무기로 소련을 설득하고, ③소련에 대해 특히 세심하고 품위 있는 대접을 하도록 유의하며, ④소련과 프랑스가 어떤 양보를 할 경우 그 나라들이 그 내용을 미국에 먼저 통보하는 것을 양해한다는 등의 방침을 가지고 소련설득에 나섰다.


특히 미국은 7월 초 NATO 정상회의에서 토의될 NATO 개혁안과 G-7 정상회담에서 토의될 대소련 원조계획에 대해 소련에 미리 통보해 줌으로써 고르바초프의 당내 입지 강화를 도왔다. 미국과 서독의 호의를 확인한 소련은 7월 16일 고르바초프-콜 간의 코커서스 회담에서 통일독일의 NATO 잔류를 포함한 대부분의 서독 측 요구사항을 수락함으로써 독일통일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