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차 北 미사일 위기는

이른바 ’미사일 위기설’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1998년 대포동 1호 발사로 야기된 1차 미사일 위기정국을 돌이켜 보는 이들이 많아졌다.

8년이라는 시간적 거리감과 당시 국제정세를 주도하는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현역에서 퇴진한 상태여서 최근의 사태와 직접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참고할 만한 대목이 있지 않느냐는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사태 전말 = 1998년 8월31일 북한은 사전 예고 없이 함경북도 무수단리에서 사정 1천800~2천500km, 무게 25t으로 추정되는 3단식 미사일을 발사해 동북아 인접국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1단계 로켓은 동해의 공해상에 떨어졌고 2단계 로켓은 65km의 고도로 일본 열도 상공을 지나 태평양에 낙하했으며 3단계 로켓은 궤도진입에 실패해 대기 중에 서 타버린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북한 당국은 이 미사일에 대해 발사 며칠 후인 9월4일 인공위성 ‘광명성 1 호’ 발사용 로켓이었다고 발표, 우리 정부를 비롯, 관련국들은 일시 혼선에 빠졌지만 결국은 북한이 노동 미사일의 후속 미사일로 개발을 추진하고 있던 대포동 미사일을 실험발사한 것으로 판단했다.

1993년 노동미사일 발사에 이어 5년만에 미사일을 시험발사한 것은 당시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미-북 미사일협상 재개를 앞두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9월5일로 예정됐던 김정일 현 국방위원장의 국가주석 추대에 앞서 대외적으로 무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내포돼 있었던 것으로 분석됐다.

◇사태 전개와 파장 = 예상했던 대로 미사일 발사의 파장은 심각했다.

가장 경악한 것은 일본. 일본은 로켓이 자국 영토 상공을 지나 태평양에 떨어진 사실이 확인되자마자 대북 경수로 지원 분담금 결의안에 서명을 연기하는 등 즉각 대응조치를 취했다. 이어 인도적 차원에서 실시해 왔던 대북 식량지원을 보류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도 현실적 위기감을 드러냈다. 이전의 미사일과 달리 대포동 1호가 대륙간 탄도탄의 전단계인 3단계 고체추진 연료방식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공격을 본토방위와 관련한 현실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미 의회는 북한 길들이기를 위해 대북 중유 공급에 전제조건을 달았고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 정책을 전면 검토할 대북정책조정관에 윌리엄 페리를 임명하면서 미국의 대북압박이 시작됐다.

그리고 클린턴 행정부와 민주당은 이전까지 반대해온 국가미사일방위(NMD)체제에 대한 입장을 전환했으며 한국, 일본과 대만을 포함하는 전역미사일방위(TMD)체제의 추진 논의도 활발해 졌다.

뒤 이어 한.미.일은 북한 핵과 미사일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대북구상을 정리, 1999년 5월25-28일 방북한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을 통해 북측에 전달했지만 북한은 이렇다할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1999년 6월부터는 북한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발사하려 한다는 분석이 제기되면서 한층 심각한 국면으로 상황이 전개됐다.

그러나 미국이 1999년 8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포기를 조건으로 대북 경제제재를 전면해제한다는 승부수를 띄우면서 상황은 급반전 됐다.

또 대북 포괄적 접근방안을 통해 북한과 한.미.일간의 상호위협 감소 및 관계개선을 이뤄 한반도의 평화공존 체제 수립을 하자는 내용의 ‘페리보고서’도 상황 반전에 기여했다.

결국 북한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간 화해무드가 조성된 한달여 후인 그해 7월 국제사회가 자국의 인공위성 발사를 지원할 경우 탄도미사일 실험을 중지하겠다는 이른바 ‘미사일 모라토리엄’을 선언함으로써 사태는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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