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연대사태’ 그 진실을 밝힌다

1996년 8월 15일 당시 연세대 교정은 전쟁터였다.

경찰은 며칠 전부터 언론을 통해 강경진압 방침을 거듭 밝히고, 전경 수십개 중대를 동원해 연세대를 둘러쌌다.

한총련 소속 학생들은 신촌로터리를 점거하기 위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교문 밖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도 폭력으로 저지했다. 경찰과 학생 수백명이 부상당했다. 투쟁과 부상이 12일부터 16일까지 밤낮으로 이어졌다.

드디어 16일 낮 12시, 제7차 8.15범민족대회 공식행사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공식행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봉쇄망을 풀지 않은 것이다. 무리한 폭력 친북투쟁을 진행해오고 있던 한총련을 와해시켜보려는 정부와 경찰의 계산 때문이었다. 한총련 주요 간부들에게는 이미 사전영장이 발부된 상태였다.

한총련 지도부의 의견은 둘로 갈렸다. 한총련 집행위원회의 다수는 봉쇄를 뚫고 지역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봉쇄를 뚫고 진입했으니 봉쇄를 뚫고 진출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연세대에 남아 투쟁을 계속한다고 해서 전민항쟁이 일어나고 김영삼 정권이 타도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정명기 한총련 의장과 서총련(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일부 간부들은 연세대에 남아 저항을 계속하자고 주장했다. 김영삼 정권의 통일운동 탄압은 현 정세가 친미세력과 통일세력의 대격돌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만큼, 연세대에 남아 김영삼 정권의 폭력성을 국민들에게 폭로하고 전민항쟁의 불씨를 당겨보자는 것이었다. 며칠 째 계속되는 학생들의 과격한 폭력시위와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 같은 친북적 주장 때문에 민심이 등을 돌린 상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5일 넘게 계속된 격렬한 투쟁으로 학생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제대로 씻기도 어려웠고, 식수나 먹을 것도 부족했다. 여학생들은 생리적인 문제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그러나 의장과 지도부의 결정에 학생들은 말없이 따라주었다. 지도부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 그것이 한총련의 정신이었다.

8월 20일 경찰의 최종 진압으로 연세대 사태는 막을 내렸다. 한총련 주요 간부와 일부 학생들은 마지막 진압이 있던 그날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종합관과 이공관 등에 끝까지 남아 투쟁했던 3천여명의 학생들은 검거되었다. 이날 검거된 3천명을 포함해 범민족대회기간 동안 총 5천여명이 검거되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을 경험한 저학년 학생들은 폭력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 선배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학생운동에서 멀어졌다. 한총련 지도부가 기대했던 전민항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총련 조직은 약화되고 대중적 지지 기반은 더욱 좁아졌다. 일부 지역총학생회연합과 대학은 한총련을 탈퇴했다.

투쟁과 진압의 와중에 경찰이 사망하면서 국민들도 한총련을 외면했다. 시민들은 ‘북한이 좋으면 북으로 가라’며 한총련을 비난했다. 96년 연세대 투쟁을 계기로 한총련은 사실상 붕괴의 길에 접어들고 말았다. 수만명이 모이던 한총련 집회의 규모는 10분의 1로 줄었다. 지도부의 전술적 무능과 판단착오로 인한 결과는 가혹했다.

한총련 지도부의 전술적 무능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연세대 사건은 북한 중심의 통일운동, 범민련 주도의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는 일부 통일운동 세력의 강박관념이 빚어낸 비극이기도 했다.

95년 국내 통일운동 진영 일각에서는 좀 더 대중적인 통일운동단체를 만들자는 주장이 나왔다. 사실상 이적단체로 규정된 범민련을 해체하자는 주장이었다. 범민련과 범청학련 등 친김정일 통일단체들은 무리하고 모험적인 이벤트식 투쟁으로 ‘새로운 통일운동단체 결성론’에 맞섰다. 8월 15일 범민족대회에서 남북해외대표 6백명이 참가하는 범청학련 총회를 열기로 한 것도 모험주의적인 이벤트식 투쟁의 하나였다.

4월 20일, 범청학련 공동의장단 회의에서 6차 청년학생통일대축전과 때를 같이해 남북해외대표 6백여명이 참가하는 범청학련 1차 총회 개최를 합의했다. 범청학련 북측본부는 5월 전북대에서 열린 한총련 제4기 출범식에 맞추어 6차 청년학생통일대축전에 참가할 200여명의 명단을 팩스로 보내왔다.

한총련(범청학련 남측본부)은 6월에 학생대표 2명을 북한에 파견하고, 8월 6일에 조선대학교 류세홍 씨와 연세대학교 도종화 씨를 범청학련 남측대표로 평양에 보냈다고 발표했다. 8월 15일 범민족대회에서 범청학련 총회를 반드시 열겠다고 선포함으로써 정부와 경찰의 강경대응을 자초했다.

그러나 연세대 사건의 가장 큰 비극성은 당시 학생운동이 잘못된 사상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주와 통일을 내걸고 투쟁했다. 그러나 자주와 통일운동의 본질은 남한 땅에서도 김정일 수령군사독재를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온몸을 던져 남한 정권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던 것은 남한의 민중도, 북한의 동포도 아니었다. 북한 인민들을 폭력으로 억누르고, 남한의 청년들을 사상으로 기만하며 간신히 수령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김정일 정권이었다.

조국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싸운다는 그들의 투쟁이 오히려 북한 인민의 고통을 연장하고 남한 민주주의의 걸림돌이 되고 있었던 셈이다. 서글픈 비극이었다.

연세대 투쟁 이후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지난 13일 연세대에서 <연세대 투쟁 1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한총련은 기지회견문을 통해 당시 연세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며,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어떤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것인가?

폭력적인 친김정일 통일운동을 정부가 계획적으로 탄압했다는 것을 규명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새삼스러운 사실도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한총련이 그 점을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았는가.

당시 한총련은 김정일 정권의 방패막이였고, 지금도 여전히 김정일 장군의 충직한 전사라는 것, 진정으로 규명돼야 할 진실은 이것이 아닐까? 잘못된 신념과 전술적 무능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을 폭력과 좌절 속으로 몰아넣었던 당시 한총련 지도부의 용기 있는 양심선언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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