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과 현재 ‘서울 불바다’ 인식차 요인은

남북이 연일 호전적 ‘강 대 강’ 설전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 때문에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가에서는 과연 무력충돌은 일어날 것인가? 설마 제2의 한국전쟁으로 비화될까?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을 운운해도 마땅한가? 등 갖가지 상상력이 대두되는 상황이다.


동양에 손자병법의 저자, 손자가 있다면 서양에는 ‘전쟁론’을 쓴 클라우제비츠가 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전략이라는 동양적 전쟁론에 비해 ‘전쟁은 정치(정책)의 연장’이라는 것이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의 핵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마저 ‘전쟁은 평화를 보전하기 위한 수단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을 만큼 전쟁에 대한 이해는 인류문명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왜 아직도 한반도는 전쟁이란 가장 극단적 폭력의 이미지가 현실에 어른거리는 공간인 걸까. ‘달라도 너무 다른’ 적대적 두 체제가 150km를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무장충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전쟁이란 그래도 완전히 다른 의미임은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전쟁을 이해하는 일’과 ‘전쟁을 없애기 위해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는 일’은 구분하여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사활적 문제인 동시에 풀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로 고조된 위기가 안정화로 들어설지, 어느 정도의 무력충돌로 귀결될지, 통제할 수 없는 전쟁수준으로 악화될지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정전 60년을 갓 넘은 2013년이라는 시기, 한반도라는 공간적 맥락에 맞춰 전쟁의 원인과 실체가 무엇이냐를 이해하는 것은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선행돼야 할 지적 이해이다.


그런데 북한의 전쟁관은 무엇이며 서구의 전쟁이론이 현 상황에 어떤 설명력과 적실성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전쟁의 개연성과 전쟁의 원인을 구별하지 못하면 자칫 섣부른 오판에 이르기 쉽기 때문이다. 오랜 전쟁연구는 바로 이런 점에 주목, 개인과 사회 차원의 요인뿐 아니라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원인을 발견, 전쟁을 국가들 간 관계의 산물로 보는 차원으로까지 나아갔다.


우연의 일치 같지만 20년 전인 1994년 상황과 지금은 매우 유사하다. 김일성이 사망하던 그 해 봄, 김일성-김영삼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에 온 북한 대표 박영수로부터 ‘서울 불바다론’이 나왔다. 당시는 북한의 핵 개발 의혹이 처음 제기됐던 때로, 한 해 전인 1993년 3월 북한은 NPT(핵확산금지조약)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하여 1차 핵 위기가 고조되던 때였다.


북한의 노동당 실무대표 격의 한마디에 서울은 사재기로 들썩였고 정부는 동요하는 시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분주했다. 하지만 군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북한 군 최고 수뇌부는 물론 젊은 지도자라는 김정은 본인도 ‘워싱턴 불바다’까지 위협하고 나오는 상황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은 서울 시민 누구도 생필품 사재기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도 잠잠하고 오히려 20년 전엔 침묵하던 군이 ‘원점 타격’을 들고 나올 만큼 적극적인 말의 대응을 하고 있다. 이 상황은 도대체 뭘까? 그 때와 지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차이가 비롯된 이유가 뭘까?


대략 네 가지 요인이 섞여있다고 본다.


첫째, 절박함. 천안함·연평도 사건에서 무기력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던 한국군으로선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절박감이 강경발언의 배경일 테다. 어찌 보면 애매한 ‘원점타격론’이란 달리 말하면 상대를 초토화시키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압축이기도 하겠지만, 실은 우리도 더 이상은 방관하지 못하고 또 그렇게 되면 ‘판’이 커질 테니 제발 가만히 있어 달라는 간절함의 다른 표현은 아닐까? 북한도 마찬가지다. 20년 전엔 노동당 간부의 한마디만으로도 서울시민이 동요했으나 이젠 북한군 최고지휘부와 김정은 본인이 나서도 심리적으로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당황스럽지 않을까?


둘째, 안보불감증. 연평도 사건 등을 겪으며 역설적이게도 북한의 도발위협에 대한 국민의 인식수준은 담대해졌거나 진짜 안보불감증이 만연해 있거나, 이 둘이 혼합된 상태다. 전쟁이 나면 북한은 진짜 망할 텐데, 자기가 죽으려고 전쟁을 일으킬 바보가 있겠는 가란 생각을 이젠 모두가 할 수 있을 만큼 안보문제는 더 이상 전문가들의 영역이 아니라 축구경기처럼 모든 사람에게 익숙한 주제가 돼버렸다.


셋째, 체념. 현 상황은 당사자인 한국이 뭔가를 해서 직접적인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낼만한 구조가 애초부터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그간 축적된 경험에서 비롯된 체념은 안보불감증이란 대중적 멘탈리티(mentality)와 밀착돼 있지 않을까. 소위 ‘선택적 친화력’이 있는 두 개념의 결합이 담대함과 무심함을 가속시킨 근본원인인 것이다.


넷째, 성숙된 시민의식. 안보불감증과 체념뿐 아니라 20년 전과는 몰라보게 성숙해진 시민의식이 이면에서 같이 자라났다. 성숙한 시민의식이란 다름 아닌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이해와 진단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이다. 이는 현대전이 전장에서 부딪히는 보병전이 주축이 아니라 첨단 기술력에 의한 장비싸움이란 걸 미국이 주도한 숱한 전쟁보도를 통해 학습된 결과도 한몫 했음직하다. 동시에 미사일을 피해 숨을만한 곳이 남한에는 없다는 충분한 인식의 발로 아닐까.


북한의 핵과 탄도미사일이 현실화됐다는 것은 더 이상 재래식 무기의 총량이 전투력의 크기를 재는 척도로서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뜻한다. 핵에는 핵으로 맞서야 상대가 핵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핵 억지력의 근본이다. 미-소 대립시기 ‘냉전’은 바로 억지에 의해 조성된 핵전쟁 부재의 의도하지 못한 평화였다. 한반도에서 이런 식의 평화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현 국면은 전쟁의 개연성만 있는 것일까, 구체적 원인이 싹트고 있는 단계일까.


‘그(북한)는 말썽꾸러기이다(He is a troublemaker)’라는 것과 ‘그(북한)가 말썽을 부린다(He makes a trouble)’는 것의 차이를 개념적으로 구별해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한 판단을 유지할 것이다. 2013년 지금은 남북이 전쟁을 일으킬 원인 요소는 과거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수준임에도 전쟁의 개연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위기상황이다. 남북 모두 이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소통하여, 최소한 우연히 전면전이 일어나는 어리석은 일만큼은 피할 만큼 양쪽 지도부가 현명하길 바란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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