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1월 29일 밤 8시 30분경 조선중앙TV에서 ‘어느 한 해안도시에서’라는 예술영화를 방영하던 시각. 자강도 강계시에서 폭발음과 함께 살림집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포탄이 날아들어 곳곳에서 비명이 그칠 줄 몰랐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데일리NK 자강도 소식통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북한 주요 군수공장인 26호연합기업소(강계뜨락또르(트랙터)종합공장) 지하 갱도에서 폭파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폭음과 진동이 느껴진 셈이다. 또한 벙커에 있는 탄약들이 폭발하면서 파편이 주민 살림집까지 파고들었다.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주민들은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엄동설한(자강도는 11월 영하 10도까지 떨어지기도 한다)에 옷도 제대로 못 걸치고 자식들을 데리고 집을 빠져나와 발걸음이 닿는 곳으로 줄달음쳤다는 것이다.
이에 소식통은 “전국적인 대피 훈련을 해도 이보다 빠르게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옆에 파편에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누구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줄행랑을 치기 바빴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어 그는 “그때 사람들이 도망치는 방향이 두 곳이었는데, 시내 방향으로 뛴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다고 한다”면서 “포탄 파편이 그곳으로 집중됐는데, 누구 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참사가 발생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태 근원지인 군수공업부 산하 제26호공장은 강계뜨락또르공장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폭탄(비행기 탑재용)과 포탄(방사포, 해안포, 고사포), 탄두는 물론 여러 총기류 탄들을 제작, 보관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때문에 공장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방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북문동, 남문동, 남천동, 향로동 등에 지상 공장 정문 및 후문이 있고, 지하 벙커는 지하 3층 구조로 군수물자 및 화약 등이 보관돼 있다.
이에 당연히 지하 갱도 출입 시 몸수색이 간단치 않다. 성냥, 라이터 등 점화 기구 소지 여부도 꼼꼼히 체크한다.
이번 사고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다만 당국은 ‘미제(미국)와 남조선(한국) 괴뢰도당의 임무를 받은 간첩의 소행’이라고 하다, 일주일 후 말을 바꿨다. 갑자기 ‘화기엄금’ 지시를 어긴 노동자들의 소행으로 마무리 지었다는 것이다.
당국의 ‘이상한 대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고 발생 다음날(30일) 아침부터 방송차를 동원, “여러분! 힘들어도 거리에 나오셔야 합니다”라고 독촉했다. 이에 주민들은 아수라장이 된 시내부터 치워야 했고, 본인 집은 이후에 정리해야 했다.
또한 자강도 주민들은 그때 일을 회고하면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방송차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아니면 3방송(라디오)으로라도 어느 쪽으로 대피하라고 했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울분을 터트리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당국은 공식적으로 사망자 수를 발표하지 않았다. 주민들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숨진 사람이 600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당시 희생된 임산부도 많았다. 이에 주민들은 ‘그 아이들이 살았다면 지금쯤 건장한 청년이 됐을 것’이라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다.
희생자엔 갱도 내부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들도 포함된다. 당시 당국은 더 큰 폭파를 막기 위해 지상으로 나오는 출구를 모두 막았다고 한다. 그러고도 그냥 보상 없이 ‘순직’으로만 처리했다.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사후 처리를 문제 삼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 위원장이 올해 말 이곳을 시찰하면서 희생자를 위로하는 발언은 물론 보상을 지시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는 ‘전략물자 손실’ 문제만 언급하면서 ‘사고 대비’를 강조했다고 한다.
소식통은 “이 같은 행태는 관련 간부를 통해 강계시에 소문이 퍼졌고, 이에 피해 가족들은 ‘포탄보다 희생한 사람들이 더 귀중한 거 아닌가’라는 억울한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면서 “강계시 폭발 사건은 벌써 30년 정도 됐지만, 시민들 가슴 속에는 아직도 아픈 기억으로 또렷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