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평양, 틀에 짜인 김일성도시”

1989년 1월 하순 어렵게 북한의 입국허가를 받고 L.A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주의사항을 듣고 입국비자를 받았다.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하고 있는데 평양행 승객들은 선물용 보따리가 너무 많아 의아했다.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는 사람 무게보다 화물무게가 항상 많았다고 한다.

“조선민항”(지금은 고려민항)에 오르니 한겨울인데도 기름을 아끼느라 기내가 썰렁해 발이 시릴 정도였다. 비행기는 100여명 정도 타는 낡은 소형 여객기였다. 심지어 안전벨트도 없는 좌석이 많았다.

기내 방송이 나온다. “우리 조선민항은 북경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평양까지 여러 손님들을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평양까지의 거리는 1,000㎞이며 비행시간은 이륙 후 약 1시간 15분으로 고도 약 900m의 높이로 안전하게 비행하겠습니다”는 내용이었다. 승객들은 일본 조총련계가 약 70%이고 그 외 유-럽계와 중국계 등이었다. 재미 동포가 집단으로 14명이 가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북경 ~ 평양 1,000km를 1시간 반 정도 비행하여 평양 순안 비행장에 도착 고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초대 만찬을 시작으로 일주일간의 평양관광이 시작됐다. 북한 측의 관광계획에 따라 모든 행동을 따라 다녀야만 되는 강행군식이였고 저녁식사 후엔 외출금지였지만 나가 봐도 갈 곳이나 볼 것이 없는 상태였다.

방안에서 ‘위대하신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에 대한 선전영화만 지루하게 보다가 억지로 잠을 청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자유행동 시간은 전혀 가지지 못했다. 아침저녁 식사는 첫날부터 정해준 식탁에서 출국할 때까지 같은 식탁을 이용해야 한다. 점심은 외식으로 주로 단고기(개고기)와 불고기를 주문했다.

식당메뉴는 주문식이 아니고(현재는 메뉴가 있어서 개별 주문임)주는 대로 먹어야 했다. 밥의 양이 적어 더 먹고 싶어 밥을 더 달라하니 정량이 200그람이라면서 봉사동무가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다신 나오지 않았다. 그날 그날 인원수대로 배급을 받아 밥을 짓기 때문에 여유 밥이 없다는 증거였다. 밥은 더 먹지 못했다. 민망스럽기도 하고 송구스럽고 멋 적었다. 배고픈 나라에서 온 사람취급을 하는 것 같아 더더욱 황당했다.

저녁에 호텔방에서 동녘으로 타오르는 불기둥이 하나가 보였다. 섬 뜻했다. 호텔 교환에게 물어보니 ‘주체사상탑’이라고 했다. 왜? 불타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꾸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침식사는 흰 쌀죽 두 공기(200그람)에 계란 후라이 2개, 명란 젖 약간 — 배부를 리 없다. 뭔가 많이 부족했다. 관광하러 떠나기 전에 벌써 허기 질 것만 같았다. 김일성 생가는 집단 농장이나 공장에서 또는 지방 모범 기업소에서 동원되어 “위대하신 수령님의 고향 집 참관”을 온 군인, 학생, 어린이 할 것 없이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천진한 인민들에게 혁명정신을 보다 더 강력하게 주입시키고 당을 믿고 무조건 따르라는 무언의 실천 현장교육이었다. 계란 크기로 계란처럼 곱게 깍은 새하얀 대리석들이 안내비석 밑에 곱게 깔려있다. 하나 가지고 싶은 도심이 생겨 안내에게 슬쩍 물어 보니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면서 기절초풍했다.

오후 4시부터 시작하는 세계적인 자랑꺼리 교예(서커스)를 보러갔다. 평양교예는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있다. 전문공연장도 있고 다른 인민에 비해 대우도 좋고 생활도 다소 윤택하다고 한다. 국가에서 양성하며 전문예술인으로 대우하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화려한 직업인 것 같았다.

공연을 할 때는 평양시민을 구역별로 동원하여 이럴 때 공연을 관람시킨다고 한다. 중앙 제일 좋은 자리에서 열심히 박수치며 정말 즐겁게 관람했다. 아슬아슬한 묘기는 평양이 아니면 도저히 볼 수 없는 정도의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감탄을 했다.

지금의 평양 고려호텔은 저녁에 술 한 잔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설이 있지만 89년도엔 편의 시설이 없어 해만 지면 따분했다.

잠이 오질 않는다. 뒤척이다가 안내에게 연락하여 지하실 매대(소규모의 판매 카운터)로 오라고 했다. 일제 ‘기린표’ 병맥주 몇 병을 단숨에 마시고 슬슬 봉사여성동무에게 말을 걸어본다. 나는 미국에서 온 동포라며 소개했다. 아무 반응 없이 듣고만 있더니 “다 알고 있습네다!”고 했다. 민망했다. “저녁식사 했습니까? 오늘 구경은 잘 했습니까? 만경대 고향집에 가 보았습니까?”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네 네만하고 말았다. 당돌했다. 아니 당당했다.

층층마다 엘리베이터 앞에 경비가 지키고 있고 일일이 인사하며 사람을 확인 하는 것 같았다. 사방에서 감시하는 느낌이었다.

관광 계획을 날자 별로 미리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런 것도 없이 무조건 태우고 다닌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사진도 허가 받아야 했고 안내나 현지 설명하는 사람 외에는 접촉금지였다. 그렇게 평양방문 이틀 째 밤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필자약력> -경남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졸업, 원양어선 선장 -1976년 미국 이민, 재미교포 선장 1호 -(주) 엘칸토 북한담당 고문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평양 광명성 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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